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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Sep 06. 2023

상처를 말하지 않는 편이 좋다

 글을 쓸 때는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쓰게 됩니다. 내 상처, 치부, 열등감과 같이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어두워 보이는 것들 말입니다. 이런 얘기는 평소에 하지 않아야 합니다. 눈앞에서 듣기에 이런 얘기들은 꽤 지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화를 나눌 때에는 즐거운 얘기를 하는 게 낫습니다.


 중학교 시절에는 꽤나 외로웠습니다. 친구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잘 몰랐기 때문이었을까요. 2학년 때인가? 가끔 피시방도 같이 가고 학교에서도 밥을 같이 먹게 되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저와는 다른 초등학교를 나온 원래 친했던 무리에 끼게 된 것이어서 다른 초등학교 출신인 저는 조금씩 소외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집단이 봤을 때 나는 분명 그렇다 할 매력이 없을 텐데 내가 먼저 이 친구들에게 친해지려고 하고 의존하려고 한다면, 나만 우스워지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종례 시간에 학교 선생님이 수업 종료 선언을 하게 되면 생기는, 가방을 챙기고 교실 밖으로 나가기 전까지의 시간 동안 저는 그 친구들이 내게 같이 피시방이나 친구 집으로 가자고 말해주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냥 “너희 집 비냐?? 가도 되냐??” 이런 식으로 물어보면 되는데 저는 친구들이 귀찮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도 못 걸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쉬는 시간에 이어폰을 꽂고 엎드려서 애들이 진짜 나를 몰라주는 것에 대해 원망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공상의 시간을 가지기도 하고, 매일 혼자 집에 가면서 자책도 하고, 같은 학원에 다니지 않아서 그런가 하는 다른 이유를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남 눈치를 많이 보는 제 천성 덕분에, 별것 아닌 말에도 상처를 받았습니다. 공부를 잘했거나 축구라도 잘했으면 상처가 덜했을까요? 이제와 생각해보면 가장 부족했던 건 친구들과 즐겁게, 재미있게,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능력이었습니다.


 중학교 때까지는 마음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좋아했다기보다는 많이 했습니다. 당시의 집안 분위기 자체가 안 좋았던 건지, 제가 공부를 안 해서였는지, 어렸을 적에는 공부를 이유로 부모님에게 많이 혼났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제 처지를 알아달라는 이야기를, 일종의 구조신호를 계속 보내곤 했습니다.


 중학교 시절, 제가 구몬 숙제를 안 했다는 걸 아신 아버지가 역정을 내시면서 제 구몬 교재를 다 찢어버리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찢어진 교재의 모습을 휴대폰으로 찍어서 MMS로 반에 전화번호를 아는 친구들 모두에게 사진과 함께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담긴 글을 보냈습니다. 아버지에게 직접 반항할 수 없는 어린 중학생이 생각할 수 있는 아버지에 대한 최대한의 복수였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저 말고 다른 이들에게도 퍼지길 바랐습니다. 다만 다음 날, 친구들은 평소와는 다른 눈으로 저를 바라볼 뿐이었고, 저한테 따로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물어보는 친구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수학 선생님이셨던 담임 선생님께서 누구한테 들으셨는지 저를 따로 불러서 면담을 했던 기억이 있는데, 기억은 그뿐이고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분명 전 저의 불행한 모습에 친구들이 흥미를 가지게 되어 그들과 더 가까워지길 바랐습니다. 설령 그것이 동정일지라도 괜찮았습니다. 대가 없는 아가페적 사랑이 고팠을까요?? 그런 식의 구조신호를 받은 친구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때의 저는 제 스스로 퍼뜨린 상처에 대해서 자기들끼리 조롱했을 것이다, 그래서 내게 흥미를 잃은 것 같다. 친구와 나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이 높아진 이유는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친해지고 싶다고 내 상처를 얘기했으면서 그 행동에 괴로워했습니다. 어디 이솝우화 같은 곳에 당당하게 쓰여져, 후대에 전해져도 꽤 좋은 반면교사가 될 법한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상처를 남들에게 쉽게 이야기하고 후회합니다. 여러분들은 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합니다. 제가 조심하라고 말은 했지만, 지금까지도 저는 말을 이어가기 위해서 반사적으로 약점을 말하는 때가 왕왕 생깁니다. 그런 날에는 역시나 집에 돌아와 후회하곤 합니다. 말하는 순간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습니다. 지금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 약점 같은 과거를 계속 말하고 있잖아요? 책이 나오고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에 휴대폰 메모장을 쭉 훑어보았습니다. 그중에서는 대학교 시절 제 약점, 상처를 어디엔가 말해놓고 후회하는 감정을 적어둔 메모가 몇 개 있었는데, 그 메모를 이 자리에서 한번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16년 6월 30일 오전 10시 14분

1학기를 마치고 느끼게 된 건 듬직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것이다. 내가 눈에 띄기 위해 하는 모든 행동들이 내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었단 생각이 든다. 그 행동들은 내가 재미있다고 믿었었던 행동들이었다.


 내가 점점 가벼운 사람으로 취급된다고 느꼈을 당시의 글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가볍게 보이면서도 그들이 제 내면에 있는 진중함을 알아주었으면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사람들이 그걸 몰라준다고 슬퍼했습니다. 진면모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 자체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면모인데 말이죠.



16년 8월 16일 오전 11시 43분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 유쾌함. 나는 남들 웃기는 걸 좋아하지만 웃기는 일에 재능이 별로 없어서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웃기려고 한다. 재밌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 방법은 내게 득이 될 게 없더라. 그걸 알면서도 나를 깎아내며 웃기는데, 그로 인한 손해를 겸허히 받아들일 큰 마음이 내게는 없다. 이런 대우를 받기 싫으면 이 짓을 안 하면 되는데 자꾸만 남들 앞에서 그 짓을 하게 된다.


 예능에서의 윤종신과 페퍼톤스처럼 자신을 낮추면서 웃음을 주는 사람들을 동경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겐 그들이 가진 대단한 결과물 같은 것들이 없어서, 저를 낮추면 그냥 낮아지기만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웃겨보겠다고 계속 자학적인 농담을 던지곤 했습니다. 그게 가슴 아팠나 봅니다.



18년 10월 14일 오후 4시 5분

정말 힘들다. 몸도 마음도 무겁다. 이런 시기에 곧 전역이라는 것이 아주 큰 위안이 된다. 하지만 현재의 상태에 영향을 주진 않는다. 그것은 미래의 일이기 때문이다. 전역했을 때 나는 어떤 상태에 들어가게 될까?

솔직할 수 있도록 하자. 다들 이해해줄 테니. 어쩌면 더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18년 10월 14일. 이때가 군대 말년병장 시절인데, 이때도 솔직함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는 아주 이상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솔직함은 그저 하나의 성질일 뿐인 건데 말이죠.



 그 당시 제 인간관계가 왜 그런 양상으로 흘러갔는지 생각해보면, 그냥 제가 재미없고 매력이 부족한 사람이었기 때문이겠죠. 그럼에도 저는 언제나 제 피해의식으로 친구들을 나쁜 놈들로 만들곤 했습니다. 지금은 성격이 바뀐지 오래라 제가 짐작했던 많은 일들이 대부분 제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게 되었습니다. 설령 제가 짐작한 것들이 맞다고 해도, 그것들이 내 피해의식에 기반한 일이었다고 치부해 버리는 게 더 건강한 마음가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굳이 상처를 말하고 다니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머릿속 의심이 피해의식이라는 걸 안다고 해도 그 의심을 떨쳐내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원인제공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굳이 나서지 않아도 상처받을 일은 너무 많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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