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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Jan 29. 2024

복종중독

 복학을 하고 “현대소설의 이해”라는 전공 수업을 들을 때였다. 교수님께서 학기 초라 그런지 간단하게 A4 1장에서 2장 분량의 자유주제 글 과제를 내주셨는데, 뭘 쓸까 하다 그 당시에 자주 듣던 "복종중독"이라는 노래에서 소재를 얻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지시에 심하게 의존하는, 복종에 중독된 특정 인물이 제발 명령을 내려달라고 사정을 하고, 너 없이는 안 된다. 혼자 할 줄 아는 게 없다며 애원하는 글을 중독자의 느낌을 내기 위해 띄어쓰기 하나 넣지 않고 A4 두 장에다가 빼곡히 적었다. 당시에는 마음에 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비교적 특이하다는 것 외에는 그다지 매력 있는 문장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향니는 소위 말하는 "약 빤 음악"을 선보이는 락, 일렉트로닉 2인 밴드다. 천재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해야 할까. (몇몇 곡에서는 서태지가 생각나기도. 왜 2010년대 대중들은 향니에 미치지 않았을까?) 자주 듣다 보니 적응이 되어 그런지 나는 향니의 곡들이 충분히 대중적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느낀 곡들을 친구에게 들려주면 진짜 한 명도 빠짐없이 난색을 표하곤 한다. "좀 미래적인 느낌인데." "나한텐 아직 난해하네." "어… 난 아닌가 봐…" 이런 식이다. 평양냉면을 권하는 힙스터처럼 몇 번 더 들어보라고 친구들에게 당부해보아도 다시 들어보는 친구는 없었다. 이 글을 보는 당신도 한 번쯤은 꼭 들어보셨으면 좋겠다. 난해하면 몇 번 더 들어보시길. 정말 좋은 곡들이 많으니.


 

“복종” -남의 명령이나 의사를 그대로 따라서 좇음


 2년 전까지만 해도 난 이 복종중독이라는 노래가 남의 명령이나 의사에 따라 살아가는 행위에 중독된 사람들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곡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생각이 좀 바뀌었다. 이 노래가 고발이라기보다는 그냥 한 부류의 인간 군상을 묘사한 것에 불과했다는 생각과 함께, 그것은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는 다를 뿐 복종이 그리 나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주체적인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그 어떤 위화감 없이 내 머릿속 한켠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주체적인 삶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생겼다.


 전에는 직업 선택에서부터 주체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직업 중에서는 굉장히 주체적이라 할 수 있는, 자아실현 직업의 대표 격인 가수, 작곡에 대한 꿈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주체적이기 위해 주체적인 직업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직업을 선택하는 과정과 이유가 주체적이라면 어떤 직업이든 괜찮지 않나. 또 그 과정과 이유가 주체적일 필요도 없지 않나. 어떤 과정이든 진실하게 즐겁고 행복하면 된다. 모든 사람이 직업에서 자아실현을 해야 할 필요는 없을뿐더러, 각자의 생활양식,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행복을 느끼면 그걸로 되는 일이다. 내 생각은 그렇다. 영화 “소울”의 주제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주체적인 직업이라는 건 왠지 모르게 끌리는 면이 있다. 그래서인가, 반대로 사회 시스템의 톱니바퀴가 되는 것이 어린 마음에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고, 조금만 더 머리를 쓰면 저렇게 안 살아도 되는데? 같은 오만한 생각을 했고, 그 오만을 더 발전시켜 톱니바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멍청하다고까지 생각을 했다. 복종자들은 많고 불복종자들은 적으니 불복종자들이 더 멋있어 보였던가? 내 힙스터 기질이 그런 식으로 발현됐던 걸까?


 이제와 생각해보면 평범하게 사는 것조차 너무 치열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멍청한 일이 아니다. “평범”은 “평범”이 된, “주류”가 된 이유가 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있을지도 모르는 재능을 믿고 마냥 즐겁고 쉬워 보였던 음악이라는 길에 뛰어들었다. 물론 음악을 좋아해서였지만, 초·중·고등학생의 가장 큰 벽이었던 시험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핑곗거리를 만들어낸 걸지도 모른다. 창작물도 공부의 산물이라는 것을 어렸을 적엔 몰랐으니까.


 복종중독에 걸린 사람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하던 게 고작 2년 전 일이다. 그때는 자신감이 참 많았다. 하고 싶은 일이면 당연하게 열정 있는 삶을 살게 될 거라는 미신이 있었다. 휴학하고 음악을 하면 그냥 좋은 노래들이 쏟아져 나오고, 대중들에게 통하면서도, 음악적인 깊이가 있는 나만의 독창적 아이덴티티가 담긴 노래를 쉽게 만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렇게 되진 않았다.


 점점 생각이 바뀌어 갔다. 내 오만한 생각들은 사회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로부터 돈을 버는 것 이외의 존경할 만한 면면들을 보게 되면서 사그라들었다. 대개 성실함에 감화되곤 한다. 하루하루를 쓸모 있게 보내는 일 자체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어떠한 형태의 것이든, 성취를 위해서 노력은 필수적인 것이고, 노력을 다함에도 그 성취를 얻기는 쉽지 않다. 애초에 노력을 다하는 것조차도 미친 듯이 어렵다. 나는 음악에 노력을 다하는 일이 그렇게 힘들었다.


 이미 20대의 반을 써버렸다. 그러다 오랜만에 ‘복종중독’을 듣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문득 누가 나를 움직여서 쓸 만한 인간으로 만들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셔 그런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허슬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한 사람에 대고 열심히 사는 사람, 허슬러라고 칭하는 것은 결국 그가 빚어낸 양질의 결과물에 대한 찬사인 것이다. 과정이 있어야 결과가 있다지만, 괄목할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내 과정들은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괜찮은 결과물은 들인 노력을 티낼 수 있는 유일한 증거인 셈이다. 말로는 누가 허슬 못하나.


 내가 과정을 아는 것과 남이 알아주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고, 그래서 내 과정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자랑할 수 있는 좋은 결과물을 위해서는 자기만족 수준 이상의, 나를 갈아 넣는 수고로움이 강요된다. 대부분의 예술들이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창작하는 입장에서, 괜찮은 작업물을 위해 부단한 노력이 강요된다 한들, 그 강요에 맞춰 스스로 움직인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누가 시켜서 창작을 하는 게 아니라, 내게 작업을 강요할 사람이 게으른 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회의 시스템에 들어가지도 않고 스스로도 움직이지 않는 나를 보며 매일 자괴감에 살아가다 보면 누군가가, 어떤 강력한 힘이 나를 움직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라는 대로 하는 삶도 괜찮은 삶이겠구나..” 같은 소용없는 생각이나 하다가, 결국 그 생각은 “내가 무시하던 유형의 인간이 나였구나.”, “나를 움직여주는 누군가와 만나지 못했을 뿐인, 구속과 복종에 자유를 느끼는 사람이 나였구나.” 하는 생각으로 마무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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