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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Jun 16. 2023

계속 돌아다니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집 주변 까페를 가는 것이 내 일상의 첫 단추가 되었다. 집에서는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게 많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밥때에 맞춰 식사하는 일이나, 글을 쓰는 중에 문을 벌컥 여시고 생각지도 않은 간식을 주시는 일 (물론 대부분의 경우, 받고 나면 맛있게 먹는다), 아버지가 가끔 컴퓨터에 대한 자문을 구하시는 일 등이 있다. 내 시간을 내 생각대로 쓸 수 없을 때 생기는 집중의 공백이 아까워 많은 수험생들이 독서실을 찾고 스터디 까페를 찾는 것처럼, 나 역시 그런 이유로 주변 까페를 서성이기 시작한 것이다. 


 걸어 다니는 시간이 아까워 전동킥보드를 샀다. 헬멧은 당연히 쓰는데, 혹시나 경찰에게 걸려 2만 원을 내는 일이 아깝기도 하거니와, 헬멧을 쓰지 않은 전동킥보드 탑승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이 두 가지 이유가 머리의 보호라는 헬멧의 본질적인 존재 이유를 넘어서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경험이 없어 그런지 나는 아직 내 머리가 깨지는 것보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더 두려운 셈이다.


 글을 쓸 만한 까페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3시간은 넘게 자리에 앉아 작업을 해야 하므로 주인장의 눈치가 보일 만한 작은 까페를 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사람이 너무 많은 까페를 가기엔 군중 속의 고독이 꽤나 고달프다. 콘센트 여부도 고려 대상이고 저녁에 갈 때에는 까페 영업시간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역병이 돌고 있어 모든 가게가 10시 이전에 닫는다는 것도) 프랜차이즈 까페를 가는 건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기왕 까페를 간다면 주인장의 취향이 담겨있는 공간이 좋겠다는 이유에서 그렇다. 


 따지다 보면 내가 갈 수 있는 까페는 겨우 한두 군데로 간추려진다. 그러면 이제 같은 까페를 계속 가야 하는데, 출근하듯 같은 가게에 가는 것도 무의식적으로 꺼려진달까. 기왕 돈 쓰는 거, 새로운 공간에 소비하고 싶다는 마음일 테다. 그러자면 괜히 전동킥보드를 타고 계속 성수동을 돌아다니게 되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그렇다. 방금도 무더운 6월 날씨 속에서 까페를 찾느라 50분을 허비하고 말았다. 그렇게 까페를 찾아 돌아다니는 것도 벌써 몇 달이 되었다.


 이제는 안다. 가던 곳으로 가는 게 낫다는 걸. 전동킥보드로 몇 분도 안 되는 그곳으로 가서 라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펼치는 게 더 생산적이라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까페를 찾아다니길 멈추지 않는다. 더운 날씨 속에서 검은색 헬멧을 쓰고 생각했다. 나는 왜 돌아다니기를 멈추지 않을까. 언제나, 결국에는 늘 가던 곳으로 갈 거면서. 그때 문득 떠오른 것은 내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는, 그 순간이 오는 것을 피하려는 수작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었다. 여태까지 그래왔고,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그러는 것이 아닌지.


 난 언제나 준비 중이었다. 음악, 졸업, 글쓰기, 성공을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계속 준비하면서 알게 된 것은 책임감이 없는 준비란 너무도 가벼운, 지지부진한 삶 전반의 면책을 위한 행위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내 생활양식이었다. 언제나 본격적이지 않은 내 일상을 보면 그렇다. 한 달에 25만 원 내고 쓰는 작업실에서 좋은 스피커로 몇 시간이고 유튜브를 보는 일. 기타로 칠 줄 아는 노래만 계속 치면서 새로운 노래는 연습하지 않는 것.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일어나고는 2시간여를 집에서 밥 먹고 뒹굴다 작업실에 가는 일. 만들던 노래가 마음에 들지 않아 도중에 만드는 일을 그만두는, 그런 무기력한 습관들. 나는 그 회피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래서 세우지도 않던 계획을 세워가며 책을 만들기로 결심한 것인데, 그 작업의 본질이자 핵심이 되는 글쓰기에 밍기적대는 나를 발견하면서, 내가 이 책을 내기로 결심한 것도 내 느린 인생에 대한 면책 사유를 만들기 위한 쇼에 불과했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작가라는 타이틀 하나 얻으려고 이 짓거리를 다시 시작한 걸까? 어째 다시 제자리인 느낌이었다. 


 진짜 바보 같은 가정이긴 하지만, 노력이라는 게 전동킥보드를 탈 때의 헬멧 착용 여부처럼 다른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면, 한량으로 낙인찍히는 일이 두려워 초장부터 노력을 열심히 해두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력은 과정이고, 과정은 쉬이 드러나는 일이 없다. 나는 남들이 나름의 결과를 완성할 즈음이 되어서야 내 삶 전반에 대한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노력하지 않는다는 걸 누군가 알려주는 일은 잘 없다. 남이 알려줘도 자각하지 않으면 위기를 실감할 수 없다. 꼼짝없이 끓는 물 속의 개구리가 된다. 이렇게 인생을 태워 먹는 예술가들이 많으리라. 다만 나는 그들과 약간은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의 나는 데워지는 냄비 안에서 탈출한 걸까. 약간 익진 않았을까. 열심히 살아갈 각오가 되어있는 걸까. 


 예술의 과정이 창작의 영역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영감으로부터 술술 나오는 편한 일은 아니다. 당연히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하는 일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단지 약간의 낭만 한 스푼이 첨가되었을 뿐,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일인 것이다. 엉덩이 붙이고 딴짓하지 않고 글을 쓰는 일. 그 부단한 노력이 어렵다.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그래야 벌어먹을 수는 있을 테니까. 일이란 건 그런 거니까. 할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 글쓰기를 낭만적으로만 생각할 건가. 글도 음악도 예술도 결국 노동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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