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일 Mar 23. 2024

나의 평범성.

자기 자신에게 천재성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척, 그 인위적인 자기성찰으로 자신에게 있을지도 모를 일말의 천재성을 끄집어내어, 누군가에게 자신의 천재성을 입증할 생각마저 하게 되면, 갈 때까지 간 게 아닌가 싶지만, 별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의 내 삶 전반을 지배하는 고민이 내 평범함에 대한 지긋지긋함이니, 난 어쩔 수 없이 내 평범함에 대해 글을 쓰는 수밖에 없다. 나도 안다. 자신의 비겁함을 고백해서 그 죄악감을 덜어내려는 모습이 그 얼마나 비겁한지. 그처럼 자신의 평범함을 고백해서 그 무력감을 덜어내려는 모습이 그 얼마나 평범한 모습인지. 


천재성이란 무엇일까. 탁월하다는 뜻이겠다. 좋은 결과를 내는 것. 조금 더 생각해보자면 ‘빛나는 영감과 더불어 당연한 듯 몰입에 들어가 독창적인 연구를 해내는 특성’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독창적인 연구’를 이끌어내는 ‘영감’과 ‘몰입’의 조건은 무엇일까. 영감은 다양한 경험과 유연한 사고 방식의 결합을 통해 생겨나며, 몰입은 거시적으로는 목적 의식과 인내심의 결합, 미시적으로는 목표와 역량의 적절한 조화, 합치를 통해 이루어진다, 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영감의 표출이란 대표적으로는 음악을 만든다거나, 글을 쓴다거나, 하는 창작의 영역이 있을 것이고, 일상적으로는 탁월한 유머감각, 화술 정도가 있겠다. 영감이란 쉬이 표출해낼 순 있지만, 그것이 탁월함을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 영감의 수준, 독창성을 평가하고, 그 기준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모호한 영역에 있기 때문이며, 몰입의 도움 없이 영감만으로는 제대로 된 마무리를 짓기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 몰입의 증명은 영감의 탁월함을 증명하는 일에 비해 쉬이 벌어지곤 한다.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결코 몰입이 쉽다는 말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결과로써 정량화되기 쉽다고나 할까. 앞서 말했듯 몰입이 없는 영감은 결과를 담보하기 어렵지만, 영감이 없는 몰입은 몰입 그 자체로도 결과가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를 다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험이라는 형태로 영감이 없는 몰입을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작게는 학교 시험, 크게는 수능, 자격증, NCS 등 우리는 몰입에 대한 능력을 시험이라는 형태로, 더 엄밀히 말하자면 ‘결과’로 증명하기를 요구받는다. 시험 점수라든가, 각종 포트폴리오라든가, 뭐 그런 나의 노력을 입증하는 것들. 당연한 일이다. 시간을 들여 얻은, 누구나 인정할 법한 결과를 내보이는 것. 대다수가 고용인으로서 살아가게 될 우리가 이를 피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평가하는 입장에서 ‘결과’를 보는 것보다 경제적인 판단 기준은 없기 때문이다.  


난 어릴 적부터 시험이 죽을만치 싫었다. 이걸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시험의 존재론적인 의문 이전에, 바라지도 않던 학생 신분으로서의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미래만을 바라보며 살았다. 미래에 좋은 음악가가 되어 살아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 공부는 필요없는 일이다. 지금 읽는 소설과 만화, 철학 서적, 항상 듣는 음악들, 떠올리는 모든 생각과 망상들, 그런 것들이 내게 도움이 도움이 되면 되었지, 시험 공부 따위가 나의 인생에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왜 내가 스스로 바라지도 않은 학생으로서의 쓸모를 증명해야 하는가. 나는 이런 고민이 성인이 되면, 비교적 자유로운 대학생이 되면 사라질 줄 알았다. 


애초에 태어난 시점에서 우리는 강제로 부여받은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며 살아야 한다. 선사시대, 농경사회, 현대 사회, 그 어떤 시대에서도 모든 생명체는 각자가 태어난 시대와 환경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난 이렇듯 당연한 수순을 밟는 것을 그리도 꺼려했고, 지금 역시도 그걸 어려워하고 있다. 나의 쓸모를 증명하는 일은 강제로 부여받은 학생으로서의 쓸모를 증명하는 일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무릇 증명했어야 할 나의 음악적 소양,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미래를 증명해내지 못했고, 주어진 자유를 자유롭게 탕진할 뿐이었다. 지금은 그 자유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하고 있다. 스물일곱이 한 달 남은 이 시점에서. 


예전엔 고학력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어차피 요즘 세상, 그리고 미래에는 학력이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었다. 신포도라고 생각한 거 맞다. 좌우간 내가 말하고 싶은건, 그 어린 시절에 그 지겨운 공부를 참고 견뎌내어 좋은 학교에 간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는 거다. 고학력자들은 일괄적으로 진행하는 테스트에 높은 성적을 내어 ‘명문대’라는 지표를, 쓸모의 증명을 위한 하나의 지표를 만들어낸 셈이다. 반면에 나는 쓸모를 증명하기보다는 내가 천재성을 지니고 있기를, 지니게 되기를 바라며 살았다. 영감이 넘치는 인간이 되도록 노력했다는 말이다. 재치있게끔 행동하고, 많은 잡지식을 알아두고, 고급 어휘를 구사하고,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사색을 하며, 창작을 했다. 그러면 누가 알아봐줄까 싶었다. 


최근 유명한 코미디 유튜브 채널의 PD 직무에 지원한 적이 있다. 친구들과 코미디 유튜브 채널을 만들고 즐겁게 운영했던 경험을 살려 이력서를 써보았다. 내 은근한 자랑거리인 메모하는 습관과, 분야는 다르지만 1인 독립 출판을 혼자 진행했던 경험도 이력서에 녹여냈다. 두 군데 지원했는데, 두 시간 쯤 전에 한 곳에서 연락이 왔고, 나머지 한 곳의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다. 이것도 역시 떨어지지 않을까 싶다. 


영감은 쉬이 휘발되고 몰입은 흔적을 남긴다. 번뜩이는 영감에 얕은 몰입의 결과이든, 보잘 것 없는 영감에 깊은 몰입의 결과이든, 결과가 없다면 우리는 그의 천재성을 이해할 수 없고, 반대로 결과가 있다면 우리는 그의 천재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천재성을 가지기 위해선, 계기가 되는 ‘영감’보다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힘인 ‘몰입’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천재성의 증명은 결과의 증명에 따라오는 칭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아직 천재성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어떻게든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다면, 천재성을 보유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계속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내가 쓴 책과 내가 만든 영상 컨텐츠, 나의 모든 행동과 생활 양식들은 무엇 하나 나의 탁월함을 증명하지 못했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천재가 될 수 있을까. 물론 이런 글을 계속해서 써내려가는 것이 천재성의 증명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은 아주 잘 알고 있다. 


만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일까. 비범한 면을 가진 누군가가 평범한 나를 알아보고 나의 대단한 면을 일깨워주는, 무협의 기연, 로맨스의 나랑 계속 엮이는 여자애, 소년만화의 롤모델, 라이벌 같은 것들. 나도 발견하지 못한 나의 천재성을 누군가 발견해주어, 몰입의 길로 자연스레 빠져들어가 결국 천재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그런 일들. 당연히 그런 일은 보통 없고 결국 내가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요행을 바랐다. 왜 나는 노력도 필요없는 천재이기를 그 어릴 적부터 갈망하게 되었을까. 


평범하다는 건 뭘까. 다들 평범을 자신의 적당한 이상대로 살아가는 것이라 믿는다. 적당히 돈을 벌어 적당한 가정을 이루고, 적당히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끝없는 이상을 바라보던 나는 평범함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정말 그렇다면 평범하다는 것조차도 내겐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 듯하다. 


만일 지금의 매사 졸리고, 버겁고, 무겁고, 머리 아픈, 이것이 평범한 일이라면, 적당히라도 행복하기 위해선 특별하기까지 해야 한다는 걸까. 내 기준이 잘못되었던 걸까. 나의 평범함이 너무 높은 곳에 있다. 특별해도 평범한 줄 알고, 불행한 게 평범인 줄 모르니, 나는 우울할 수밖에 없다. 


이제 난 영감을 기다려야 할까, 아니면 이력서를 다듬으러 가야 할까. 아무 글이나 쓰기 시작해야 할까, 아니면 취업을 위해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있어야 할까. 어서 정하고 하나만 해야 할 텐데, 그걸 정하는 게 쉽지가 않다. 쉬운 게 없다. 다 내팽개치고 노는 것도 심적으로 힘들고, 이렇게 치부 다 드러내면서 글쓰는 것도 힘들고, 아침에 자서 낮에 일어나는 일도 힘들다. 물론 밤에 자서 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시도조차 힘든 일이다. 이렇게 징징대는 글을 윤문하는 것도 힘들고. 어째 힘들지 않은 게 없다. 


이런 범재의 글이 누군가에게 어떻게 닿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자그마한 흔적이나마 남기고자 이 글을 쓴다. 이 글에서 내 평범함, 그보다 더 게으른 나를 고백하는 건, 죄수가 판사에게 반성문을 제출하듯, 달라지려는 나의 모습을 증명하려는 발버둥임을 밝히며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갓 지은 미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