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당신에게

by 일연

사랑 앞에서 미련이 많다. 사랑이라는 한바탕 공연이 끝난 자리, 상대방 배우는 이미 자리를 떠나 버렸건만 나는 핀조명이 비추고 있는 무대 위에 홀로 덩그러니 남아 그 자리를 지키곤 한다. 셈에 서투른 나는 사랑 앞에서는 유독 더 서투른 사람이 되어 계산 따위 할 줄 모르고 통으로 마음을 넘겨 버리곤 한다. 그렇게 내 자리에 한 발을 남겨두지도 않은 채 두 발을 옴팡지게 그의 안으로 넘어가 내 삶을 통으로 넘겨줘버리고 나면 사랑이 끝난 후에도 그 열기를 오래도록 머금은 채 그 자리를 지키곤 한다.


도무지 식을 줄 모르는 사랑의 열기를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날에는 자주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앞으로의 일은 알지도 못한 채 끝이라는 게 있을 거라는 가정조차 없었던 그 시간으로, 그렇게 무방비로 사랑만 했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미련과 바람은 부끄러움에 비할 바가 아니어서 돌아오지 않을 답이나 거절로 입을 상처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늦은 밤, 벌건 대낮에 미련 가득 담긴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잘 지내?"


부끄러운 줄도, 돌아오는 답이 거절일 때에는 더 큰 상처를 입을 것도 알지 못했다. 아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그렇게 속절없이 지나간 사랑의 옷 끝자락을 붙잡으려 애썼다. 미련이 많아서. 영원을 말하던 사랑이라는 게 끝날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좀처럼 어려운 사람이라서.


사랑이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거지 같은 일들만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불현듯 찾아온 사랑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들로 끝나버렸고, 그저 끝났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그 사랑의 끝을 붙잡고 늘어졌다. 옷자락 끄트머리를 놓아버리면 이 사랑이 영영 끝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할 것만 같아서. 나는 사랑이었던 마음을 미움으로 증오로 비난으로 자꾸만 그 모양을 바꿔 이어나갔다.


약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로 들어가 지하철을 타러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한바탕 찾아온 추위에 발걸음을 재촉하며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다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려 잠시 멈춰 선 순간. 눈앞에 놓여있는 내리막길 계단 앞에서 나는 그대로 멈춰 섰다가 일순간 얼굴 근육이 풀어지며 양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는 저 계단 아래에서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오늘처럼 추운 날이었던 1월의 어느 날. 내 생일을 축하해 주겠다며 한 손에는 케이크를, 다른 한 손에는 꽃다발을 들고는 늦어서 미안하다며 뛰어오는 뿌연 입김을 연신 내뱉고 있었다. 그렇게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그의 모습이 내 앞에 멈춰 서자 안개처럼 환영이 되어 사라졌다. 우리가 사랑을 했던 순간의 환영이었다.


맞아 그랬었지. 나도 사랑을 받았었지. 문득 그날 3호선 안국역 계단에 잠시 멈춰 섰던 그 순간. 저 멀리서 나와 눈이 마주치고 해맑게 웃으면서 굴뚝같은 입김을 내뱉던 그 모습을 다시 마주한 순간, 지나가버린, 그래서 잊고 있었던 사랑받았던 순간들이 다시 환영처럼 되살아났다. 나도 사랑받았구나. 그 끝이 어떠하든 넘치게 사랑받은 순간이 있었구나.


어느새 나는 우리가 사랑했던 순간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때를 다시 살아보고 싶어서 나는 사랑했던 순간들을 기록한다. 넘치게 고마웠던 그 순간에 또 살고 싶어서. 끝이 났다는 이유만으로 거지 같다고만 생각했던 내 사랑도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았던 순간들로 가득했다는 걸 알 수 있어서. 다시 살고 싶은 순간이 있을 때마다 나는 글을 쓴다. 그 순간을 다시 살고 싶어서.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연인을, 가족을, 친구를 사랑했던 순간들을 그리워해본 적 있으신가요? 그 인연이 지금 내 곁에 남아있지 않더라도 사랑했던 순간들은 분명 우리 안에 남아있을 거예요. 그 끝이 어떠했든 말이죠. 그 끝이 아무리 아프고 힘들었다 하더라도, 우리 찬란하게 사랑하고 아이처럼 좋아했던 그 순간들은 아름답게 기억하기로 해요. 미워하는 동안은 헤어진 게 아니라는 말이 있죠. 헤어지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미워하는 마음마저 온전히 사라졌을 때, 그럼에도 찬란했던 순간만 골라 기억이라는 서랍에 넣어 그 서랍을 닫고는 예쁜 끈으로 손잡이를 묶어 두려고 해요.


우리는 사랑했고 사랑받았고 그 순간 누구보다 아름다웠을 거예요. 혹여 지금 사랑을 하고 계시다면 이 순간이 다시 써야 살아볼 수 있는 과거가 되지 않도록 상처받을 두려움 따위 잊어두고 무방비로 속살을 내보인 채 사랑에 빠져보세요.


그리고 저는 사랑의 순간을 다시 살고 싶을 때면 노트를 꺼내 펜을 들고 그 순간을 기록하기 시작했어요. 그럼 잊고 있던 사랑의 순간들이 되살아나 내가 살았던 순간이 전부 사랑이었구나 지나온 사랑 속으로 돌아갈 수 있더라고요.


봄이 성큼 다가왔어요. 오늘 길을 지나다 보니 나뭇가지마다 아주 자그마한 새싹이 스을쩍 고개를 내밀었더라고요. 당신이 혹여 오랜 시간 사랑을 멈추었던 사람이든, 사랑을 떠나보냈지만 아직 마음에서 보내지 못한 사람이든 사랑하고 찬란했던 순간들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봄이 다시 돌아오고 새싹이 돋아나듯 당신의 마음에도 그리고 제 마음에도 사랑이 다시 자라나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우리 마음껏 사랑하기로 해요. 저도 같이 해볼게요. 오늘도 고맙습니다.


일연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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