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내 나이가 두 자릿수로 변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부터인가 난 내 몸의 변화들과 관련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거뭇거뭇한 털들과 툭툭 터지는 여드름들은 내게 있어 성장한다는 기쁨보다는 예상치 못한 변화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그래도 그런 것들은 어찌어찌 감추고 가리고 할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변해가는 목소리는 세상과의 모든 소통을 끊는 것 말고는 숨길 방법 없는 것이어서 꽤나 오랜 시간 동안 혼자만의 풀어내지 못한 스트레스가 되었던 것 같다.
같은 변화 경험하는 또래들과의 공감이라도 있었다면 조금은 나을 수 있었겠지만 사춘기와 함께 나를 찾아온 실명은 해소의 통로마저 막아버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서 특수학교에 입학하고 2차 성징은 무엇이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교육받으면서 난 조금씩 내 변화에 대해 머리로는 이해하기 시작했지만 어른이 되어가는 달라짐에 대해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에는 훨씬 많은 의심과 오해의 시간들을 거쳐야만 했다.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아버지나 어머니를 말하기도 하고 유명한 연예인이나 존경하는 어떤 대상을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건 나를 제외했을 때의 이야기라고 나는 확신한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면 나보다 다른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더 사랑하기는 힘들다.
연인도 가족도 그 어떤 관계에서도 다투지만 그때마다 나는 끝까지 내 편을 배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작은 변화들에 대해서조 차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긍정적 사고를 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만 했다.
실명에 대해서는 더더욱이 그랬다.
입으로는 글로는 조금의 다름일 뿐이라고 했지만 그 발언과 기고에 진심과 신념이 담기기까지는 또 다른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20년을 넘어서 30년을 향해가는 내 장애의 시간들을 겪으면서 부단히 소수의 다름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왜곡되지 않은 진실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이야기하면서도 사실 어느 순간엔 아직도 나 스스로 조차 그것이 부족함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기도 한다.
그 존재가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요즘 감수성에 대한 논의가 많다.
젠더 감수성, 장애 감수성, 인종 감수성, 세대 감수성 등등 나 아닌 다름에 대해 이해하고 올바로 느끼는 마음가짐에 관한 것들이다.
집단 간 갈등과 혐오의 원인을 이런 감수성의 부족으로 원인 삼기도 하고 그 어떤 부분에서인가 그러한 감수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을 뭔가 시대에 뒤떨어지는 부적응자로 치부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그런 대우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해되지도 않는 집단에 대해 무조건적인 선의와 공감을 표하기도 한다.
난 여러 다름의 집단들이 살아가는 인간세상에서 감수성 높이는 일은 무엇보다 순고한 가치를 가진다는데 깊은 동의를 느낀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떤 강요나 주입으로 빠른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
조금 더 민감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둔감한 사람도 있기는 하겠지만 전자의 경우라고 해서 교육이나 설득으로 한 번에 완벽한 감수성을 가질 수는 없다.
난 어른이 되어가는 정상적인 인간의 변화에 대해서도 기쁘게 받아들이는데 꽤나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일반적이지 않은 실명이라는 다름으로의 변화에 대해서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에너지가 필요했고 그것은 아직도 조금은 진행 중이다.
난 모든 다름과 생소함에 대해 적응하고 공감하는 데에는 그만큼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고 본다.
남성이 여성을 다수성 애자가 소수성 애자를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올바른 감수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적어도 내가 나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보다는 몇 배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편견 없는 공존을 위해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바라는 것은 정말 필요한 일이지만 그와 함께 나의 다름을 이해해주는 기다림의 시간 또한 분명히 필요한 과정이다.
어린 시절 내 몸에 돋아나는 털들을 내가 받아들이는 데에는 교육과 설득의 과정들이 분명히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그와 함께 지나온 자연스러운 기다림의 시간들 또한 분명 필요했다.
부족한 내 눈을 받아들이는 것은 나에게도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했다.
잘 공감되지 않는 소수의 다름이 있다면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다가가기를 권한다.
이해받고 싶다면 상대에게도 시간을 주었으면 좋겠다.
내 친한 여자 사람 친구는 아직도 화장기 없는 스스로의 맨얼굴을 적응하지 못해 아침의 화장 전에는 거울을 최대한 보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40여 년 동안 서로를 인류 중 가장 사랑하는 이성으로 여기고 살면서도 현시점까지 서로의 다름에 대해 감수성을 높이는 과정을 거치고 계신다.
우리에겐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조급해하지 말고 상대를 비난하지도 말자.
우리는 지금도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