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의 입장에서 이기적으로 관계하기

by 안승준

중학교 때 한 영어 선생님께서 중간고사를 앞둔 우리 반 친구들에게 귀가 솔깃할만한 제안을 하셨다.


선생님께서 각자에게 정해준 목표 점수를 넘기면 맛있는 간식을 쏘시겠다는 것이었다.


간식도 그냥 간식이 아니었다.


그 당시 우리 용돈으로 먹기엔 엄두가 나지 않았던 신상 '파파이스 치킨 세트'가 그 주인공이었다.


먹을 것 때문에 공부한다는 비 안양은 선생님이 던져 주신 거대한 미끼 앞에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수업은 녹음해서 듣고 또 듣고 문법책이고 영어 단어장이고 닥치는 대로 외우고 옮겨적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목표를 향해 전진했다.


상대적으로 영어과목에 그다지 큰 관심 없었던 나의 학창 시절에서 그렇게 열심을 다했던 시기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식욕이라면 세상 누구와 겨뤄도 지지 않을 것 같던 10대 혈기왕성한 중학생에겐 치킨 세트라는 강화는 모든 것을다 걸만큼의 도전의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시험날이 되고 예상보다 문제는 난이도가 많이 높았다.


풀었다기보다는 찍었다는 표현이 맞을만한 문항의 수가 더 많았다.


점수 발표날까지 기다리기엔 뛰는 심장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온갖 책들을 뒤져가며 나름의 가채점을 시작했다.


결과는 만점이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그 때가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생애 어느 순간의 백점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감격스러웠다.


분명한 목표를 정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올림픽 금메달을 딴 선수가 웃음이 아닌 울음을 터뜨리는 이유를 난 분명하게 공감하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의 경쟁 선수를 이겨가듯 난 풀 수 없을 것 같은 문제들을 하나하나 풀어갔고 결국 시상대의 꼭대기에 서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공식적으로 점수가 발표되던 그날! 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선생님께 큰 목소리로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선생님의 목소리는 뭔가 좋은 기분의 향기를 전혀 머금지 않고 계셨다.


한 문제 한 문제를 풀이해 주실 때도 난 가채점 결과와 다르지 않은 정답들을 확인하면서 그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친구들의 참혹한 점수들이 발표될 때쯤엔 전체적으로 낮아진 평균 때문에 선생님께서 기분이 좋지 않으시구나 정도는 느꼈지만 그래도 내 차례가 되었을 땐 칭찬을 해 주시겠지라는 굳은 믿음까지 변하지는 않았다.


목표 점수는 겨우 넘기긴 했지만 만점과는 거리가 꽤나 있었다.


이의제기를 정중히 드리고 확인한 내 답안지에는 복잡한 감점 표시들이 잔뜩 체크되어 있었다.


분명히 틀린 게 없는 것 같은데 주관식 문제마다 조금씩 점수가 깎여 있었다.


선생님의 설명은 문장부호를 제대로 적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마침표와 쉼표는 그 개수만큼 마이너스되어 적지 않은 크기로 만점에서 멀어지는 요인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억울했다. 정말 너무 억울했다.


그 전의 어떤 수업에서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지적하시지 않으셨었고 더욱이 실명한 지 얼마 안 된 내게 있어 점자사용의 미숙함으로 인한 실수라는 걸 모르시지 않은 분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납득하기가 힘든 채점이었다.


그리고 둘러본 친구들의 답안지도 나와 많이 다르지 않은 이유로 목표 점수에서 조금씩 거리를 두고 있었다.


갑자기 나이도를 높인 문제들과 유난히 깐깐해진 채점들은 치킨이라는 목표와 대비되어 뭔가 공정하지 않은 과정이라는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갑자기 변해버린 규칙이나 심판의 판정으로 눈물 흘리는 올림픽의 선수들처럼 우리는 허탈했지만 뾰족이 이 상황을 항의할 대책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았던 것은 그 와중에 살짝 목표 점수를 넘긴 내 시험지 때문이었다.


모든 점수 확인이 끝나고 미리 약속한 '치킨에 대해 난 선생님께 확인하는 질문을 드렸고 그 결과는 매를 맞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공동체 의식이 없다는 것이 채벌의 이유였지만 나도 친구들도 선생님의 그 엄한 가르침에 대해 진심으로 동의하고 있지 못했다.


그냥 더 억울할 뿐이었고 그냥 더 배신감을 느낄 뿐이었다.


핑계이긴 하지만 그 이후에도 내가 영어라는 과목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은 어쩌면 그때의 트라우마가 남아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 난 그때의 선생님이 서 계시던 교단에 올라 있고 나의 제자들은 내가 앉았던 그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그때 선생님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그때 선생님의 시간을 살면서 많은 부분 이해하게 되었다.


왜 그런 목표를 정해주셨는지 왜 그렇게 문제를 내셨는지 왜 그런 채점을 하시고 왜 나를 때릴 수밖에 없었는지도 적지 않은 부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해의 크기가 커지는 나이가 되어갈수록 내가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은 오히려 그때 학생이었던 나의 마음이다.


내가 선생님의 위치가 되었다고 그때 그 선생님의 모습을 닮아간다면 난 또 다른 억울함과 배신감을 만드는 답습을 하게 될 뿐인 것이다.


나의 학생들도 언젠가 내 나이가 되어서 나를 이해해 줄 수는 있겠지만 그 녀석들은 오늘 억울할 것이고 어쩌면 수학이 평생 재미없어질지도 모른다.


니들도 크면 알게 될 거야 보다는 나도 너희들 마음 다 알아라고 생각하고 그때의 어린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듯이 다가가는 것이 오늘을 사는 어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글을 읽는 독자들이 종종 질문하는 것이 어떨 때는 장애인도 특별히 다르지 않게 대우해 달라는 듯이 이야기하고 또 다른 글에서는 각자는 다르니 각자에게 맞는 배려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냐고 묻는다.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언제나 명확하다.


모든 사람들은 다르다. 다른 사람들이 좋은 관계를 이어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의 입장에서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내가 장애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 때는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이야기한다.


우리는 작은 다름을 가졌을 뿐 큰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으로 넓히고 자립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반대로 장애가 없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 때는 장애인의 입장에서 글을 쓴다.


소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배려해야 한다고 말이다.


모든 관계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처럼 각자의 다른 입장을 가진다.


서로의 주장은 모두 옳더라도 다른 입장에 따라 완벽히 다른 방향을 향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그런 관계를 풀어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의 입장에서 최대한 이기적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다.


특히 교사와 학생처럼 힘의 균형이 분명하게 기울어진 관계에서는 조금 더 강한 힘을 가진 쪽이 약한 이의 편에서 이기적이 되는 것이 좋다.


두 시기를 모두 살아본 어른은 어린 시간만을 살아본 학생들에 비해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기적일 수 있는 방법을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장애와 비장애의 시간을 모두 살아본 내가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이기적이 되어보려는 노력을 하기도 한다.


물론 많은 상황에서 약자일 가능성이 높은 내가 배려받고 도움받는 시간이 훨씬 많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릴 적엔 돈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고 잘생겼다는 소리를 좋아하기도 했고 힘이 세다는 것이 큰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말을 잘한다는 소리가 좋았고 또 어느 때인가는 비싼 동네에 살거나 좋은 물건을 가진 것이 내 삶의 목표라고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가장 듣기 좋은 소리는 사람 좋다는 소리인 것 같다.


자주 듣는 소리는 아니지만 인생 멋지게 산다.


두루두루 잘 지낸다.


참 좋은 사람인 것 같다는 소리가 내게 있어 가장 듣기 좋은 소리이고 그것이 나의 목표가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와 다른 목표를 가진 사람이라면 다른 노력을 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나와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이라면 한 번쯤 내 방법을 따라 해 봤으면 좋겠다.


좋은 관계를 가지고 싶다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기적이 되어라!


특히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조금이라도 내가 더 나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된다면 조금 더 서둘러서 이기적 포지션을 점유하라!


당신은 멋진 인생을 사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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