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의 칼 끝은 당신을 가리킬 수도!!!

by 안승준

수학에는 근삿값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정확한 값을 표현하거나 예측하기 힘들 때 오차의 범위 내의 값들을 동일한 값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소수점의 자릿수가 길 때 반올림을 하는 것도 원주율을 3.14로 적는 것도 편의상 사용하는 근삿값의 일종이다.


그런데 이 오차라고 하는 것은 범위가 정해 지거나 한정된 것은 아니어서 때때로는 인간의 의도에 의해 매우 작게 좁혀지거나 혹은 매우 넓은 범위로 넓혀지기도 한다.


스무 살쯤 되었다는 말은 스무 살 근처에 있는 사람이라는 근삿값의 표현이지만 의도에 따라 그 오차의 범위는 엄청나게 넓어질 수 있다.


어른처럼 보이고 싶은 10대 학생들에서부터 한 살이라도 젊어 보이고 싶은 서른 살 가까운 청년들까지 본인의 의도와 필요에 의해 그 범위를 넓히거나 좁혀나간다.


홈쇼핑의 만원대 이만 원대하는 표현도 선거 때 자주 등장하는 오차범위 내의 박빙이라는 표현도 그 오차의 범위를 목적에 따라 어떻게 규정하는가는 그 값의 정확도와 관련되었다기보다는 인간의 목적에 좌우되는 경우가 더 많다.


30대 막 받이를 달리는 내가 20~30대라고 주장하는 것도 네다섯 살 위 선배들이 40~50대 아닌 30~40대라고 주장하는 것도 인간의 본능에서 기인한 자기중심적 근삿값의 설정인 것이다.


얼마 전 내려진 낙태법 위헌 판결에 대해 찬반 논쟁이 뜨겁다.


생명존중, 여성의 자기 결정권 보장, 사회질서의 유지 등 양편의 논리도 다양하고 그럴 듯 하지만 찬성론자의 기본적 전제는 태아를 미성숙한 객체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인간으로서 인정하지 않는 근삿값 설정에서부터 출발한다.


그 상태를 완전한 인간으로 인정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것은 극렬한 가치의 충돌의 근거가 되고 그 행위는 살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정 정도 이상의 해부학적 형태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태를 낙태 찬성론자들은 존중받을 생명체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고도로 발달된 현대의학에서도 태아가 정확히 어느 정도의 사고가 가능한지 얼마만큼 의 고통을 느끼는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다.


미성숙하고 완전치 못한 대상으로 태아를 규정하는 기준을 만드는 것은 오로지 법을 정하는 이들의 토론과 의학 지식 좀 있다는 몇몇의 조언만 있으면 충분하다.


이것은 의사들과 부모들의 입장만이 고려된 지극히 의도적인 근삿값일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뱃속의 아기의 자기 결정권은 직접 표현할 수 없다는 '미성숙'이라는 이름으로 간단히 무시된다.


국가마다 시대마다 낙태 가능의 시기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칼을 겨누는 자의 입장만 고려된 부정확한 근거이고 의도가 덧붙여진 기준이라는 반증이다.


일정 날짜가 지나면 인간이고 바로 그 전날은 단백질 덩어리일 뿐이라는 냉정한 판단은 아무리 생각해도 행정편의나 행위의 합리화 말고는 잘 납득되지 않는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도 중세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마녀사냥식의 살육들도 그 시대 그 사람들의 목적과 편의들로 근거한 나름의 신념과 기준들이 합리화시켜준 결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스스로 어쩔 수 없게 아이를 잉태하게 된 미혼모의 고통도 장애아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도, 그 밖의 낙태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말 할 수 없는 수많은 사연들의 아픔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작은 아이에게 부여된 생명의 권리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그를 죽일 권리를 누군가에게 부여하지는 않는다.


인간에게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최소한의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생명존중'이다.


어떤 경우에도 다른 이의 생명을 수단으로 삼을 수 없다.


그것은 말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고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태아의 그것이라 할지라도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인간의 본능인 근삿값의 의도적 설정으로 미루어 볼 때 이것은 더욱 무서운 상황의 전주곡일 수 있다는 것이다.


미성숙하거나 완전치 못한 인간의 기준을 다수의 힘과 판단은 언제든지 의도적으로 새롭게 정할 수 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신체의 일부를 가진 태아와 후천적으로 몸의 일부 또는 기능을 상실한 인간은 근삿값의 범위에서 그리 큰 오차를 보이지는 않을 수도 있다.


사회적으로 불필요하거나 사라져야 한다고 대중의 판단이 내려지는 이들은 언제까지나 무사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 말할 수 없고 저항할 수 없는 태아를 향했던 칼 끝은 예측할 수 없는 다수의 결정에 의해 또 다른 곳 더 많은 곳을 가리킬 수 있다.


신체적으로 불편한 사람들, 지능지수가 떨어지는 발달장애 아이들,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고 판단되는 중죄인, 가정환경이 어려워서 지속적인 복지수혜가 예상되는 빈곤가정의 아이들은 다수의 근삿값 설정에서 완벽한 인간으로 언제까지나 남아있을 수 있겠는가?


또, 법으로 보장된 낙태 제도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장애아를 출산한 부모들이나 불편함을 무릅쓰고 살아가는 장애인들은 용기 있는 사람으로 취급받을지 사회질서를 해치는 무모한 이들로 치부될지에 대한 확신도 나로서는 긍정적이지 못하다.


이번 위헌 판결의 논점이 불가피한 낙태를 선택한 여성은 처벌의 대상인가 아닌가에만 초점이 맞춰지는 것 같아서 마음이 씁쓸하다.


나 또한 여성만을 죄인으로 몰아가고 단죄하는 현재의 낙태법은 절대 찬성하지 않는다. 다만 문제의 본질에 대한 해결 노력보다는 낙태 허용이라는 무시무시한 결정만이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일부의 무모함에는 두려움을 감출 수가 없다.


4차 산업 시대의 도래와 인공지능의 발달은 좀 더 적은 수의 인간만으로도 그 전 보다 많은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고 있지만 세계의 인구는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간다.


낙태법의 위헌 결정은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도 괜찮다는 첫 번째 합법적 살인의 허용이다.


두 번째 세 번째의 합법적 살인은 과연 나만의 억측인 것일까?


사람들은 오랜 시간 다양한 상황들 속에서 이기적인 근삿값을 정하고 그것을 옳은 참값이라고 믿고 따라왔다.


인간의 생명에 대한 순고한 존중은 한 번의 예외의 설정으로 빠르게 과거의 구태 가치로 전락하고 우리는 새로운 잔인함을 미래의 참값으로 받아들일지 모른다.


법과 제도는 인간들의 합의에 의해 결정되는 완전치 못한 약속일뿐이다.


우리는 또 하나의 악법을 만들지 않기 위해 조금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태아를 향하던 무시무시한 대중의 사형선고! 언젠가는 당신을 향할지도 모른다.


#낙태반대

#생명존중

#합법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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