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청정기만 믿지 마세요

by 안승준

요즘 공기질이 많이 안 좋아졌기는 한가보다.


건강한 사람들이 마스크 챙기고 미세먼지 예보 어플리케이션 수시로 들여다보는 걸 보면서도 남의 일인 줄만 알았는데 내 호흡기도 급기야 비염 선언을 하고야 말았다.


꽃가루 때문인지 미세먼지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또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런 대책 없이 견디는 것은 한계가 도달했음을 급격히 떨어져 가는 바이오리듬이 알려주고 있었다.


마스크를 사고 코를 세척하는 식염수 기기도 난생처음 장만했지만 안심이 되지를 않았다.


차도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만으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가 않았다.


공기질과 호흡기에 대한 정보를 찾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관심은 한 곳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최첨단 공기청정기 그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나의 코를 완벽하게 구해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공기청정기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모든 인간은 깨끗한 공기를 마실 권리가 있습니다'라는 광고문 구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묘히 설계된 상업적 카피에 불과했지만 나의 코가 훌쩍이는 횟수가 늘어남과 함께 신앙이 되어가고 있었다.


h13등급의 해파필터, 최고 성능의 팬 속도, 냄새와 가스농도까지 세밀하게 잡아내는 특수 센서까지 장착된 최첨단 공기청정기는 어느새 나의 식구가 되어있었다.


나름 논리에 근거한 비판적 사고를 한다고 자부하던 나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기기만큼은 그 범주에서 예외였다.


팬이 돌아가는 소리만 들어도 코가 뚫리는 것 같고 집 밖에서 스마트폰으로 원격 접속한 화면만 보아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초미세먼지라고 부르는 pm2.5의 수치는 순식간에 어느 병원 무균실 수준으로 떨어지고 꽃가루를 비롯한 다른 입자들도 우리 집에서만큼은 아무런 힘을 쓰고 있지 못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갚아나가야 할 적지 않은 카드값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그와 만난 것으로 난 천국을 경험하고 있었다.


난 공기청정기 전도사가 되었고 마음 급한 몇몇은 순식간에 나와 같은 선택에 동참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조금 더 꼼꼼하게 살펴보던 중 공기질 정보 중에서 오히려 수치가 악화되어가는 숫자가 보였다.


나의 이해가 잘못된 것이겠지 했지만 자료를 찾아보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tvoc 농도가 그것이었는데 집안의 이산화탄소나 포르말데이드 농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기기를 더 세게 틀고 위치를 바꿔보아도 그것은 정상수치로 돌아오지 않았다.


고장인가 생각도 했지만 의외로 답은 간단했다.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는 것만으로 그 수치는 금세 우수함을 체크하고 있었다.


이것도 기분 탓이겠지만 그제야 진짜 코가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식염수로 코도 세척하고 약간의 약도 복용하면서 나의 코는 정상상태에 매우 가까워졌다.


우리 집엔 여전히 첨단의 공기청정기가 돌고 있지만 내게 있어 이 녀석은 전처럼 무조건적인 믿음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비싼 가격과 화려한 스펙 그리고 왠지 모를 새로움이라는 기대가 맞물려 난 한동안 그것만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만능 해결사라는 착각을 했다.


물론 그것의 훌륭한 기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좋은 공기질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건강한 코를 만들어낸 것은 그것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비싸지는 않아도 묵묵히 코 속 깊숙이를 씻어준 식염수들과 묵묵히 창을 지키고 있던 우직한 창문들은 화려하지 않아도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해냈다.


살다 보면 뭔가 특별해 보이고 화려해 보이는 새로운 관계들에 지나치게 열광하는 경우들이 있다.


새로 산 공기청정기처럼 보통의 사람들보다는 분명 많은 재주를 가진 이들은 존재한다.


그렇지만 확신하건대 세상의 그 누구도 혼자만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식염수 같은 사람도 있고 창문 같은 사람도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완벽해질 수 있고 그때서야 비로소 공기청정기처럼 화려한 사람도 진정한 가치를 뿜어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늘 탁하고 더러운 것 같이 보여도 없어서는 안 되는 공기 같은 사람도 존재한다.


요 며칠은 미세먼지 없는 맑은 공기 덕분에 공기청정기는 휴가를 만끽하고 있다.


창문은 열려 있고 코는 시원한데 마침 내린 소나기로 공기가 조금 습한 것 같다.


그동안 잊고 있던 제습기를 불러야겠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가습기가 다시 꺼내질 날도 올 것이고 말이다.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새롭거나 화려한 누군가에 가려진 소중한 관계가 없는지 돌아보아야겠다.


공기청정기도 좋지만 창문도 제습기도 작은 식염수 한 통도 우리 집에서는 참 소중한 물건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낙태의 칼 끝은 당신을 가리킬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