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공부 잘하던 내겐 1등이 아닌 성적은 용납할 수 없는 패배였다.
최선을 다 한 것도 시험의 난이도가 높았던 것도 약간의 실수가 있었던 것도 1등 못한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그냥 절대로 1등이 아니면 안 됐다.
술 꽤나 좋아하던 대학생 때도 내겐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었다.
어느 어른에게 처음 들은 말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언젠가부터 기분이 안 좋을 때나 혼자 있을 때 술을 먹는 것은 내게 있어 음주운전만큼이나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정해져 있었다.
다음날 아무 스케줄 없는 편안한 금요일 밤에도 호프집 치킨집 불나도록 바쁜 월드컵 경기가 열리는 날에도 기분 우울하거나 혼자 있는 시간엔 치맥 소맥 아니라 와인 한잔도 절대로 먹으면 안 되었다.
운동을 할 때 먹어야 하는 음식의 양과 종류도 1주일에 채워야 하는 운동의 횟수도 연애를 할 때 나름대로 정해놓은 규칙들도 내게 절대로라는 이름이 붙여지면 난 그것을 어기는 일이 결코 없었다.
근본적으로 그 절대로들의 의미가 무엇인가 보다도 어쩌면 그냥 그것을 어기지 않는 것이 내겐 목표가 되어 있었다.
후배들에게는 절대 얻어먹으면 안 되고 술자리에서 술병은 홀수로 끝나야 하고 체지방률은 몇 퍼센트 이하로 유지해야 하고 술은 먹더라도 탄산음료나 커피는 먹으면 안 되고... 나를 가두는 절대로의 규칙들은 종류도 가짓수도 많고 다양했다.
그리고 그런 규칙들은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는데 크게 도움이 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등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 치던 그때의 공부가 지금의 내가 이 정도나마 지식은 가지고 살게 해 주었고 운동 강박증과 술 먹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시간들은 서로가 맞물려 나름 건강한 나를 지켜주었음에 분명하다.
그런데 조금씩 나이 들고 살면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세상에 절대로 안 되는 일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1등만 하면 좋겠고 후배들에겐 늘 멋지게 한 턱 쏘는 선배이었으면 너무나 좋겠지만 그건 인간으로서 불가능할 때가 많다.
정해 놓은 규칙이 늘 지켜지기만 한다면야 그 자체로 좋겠지만 절대로라는 이름 붙여진 그것들은 깨어지지 않게 버틸 때의 고통도 깨어지는 순간의 타격도 너무 크다.
1등만 하기 위한 스트레스도 적지 않지만 1등을 놓쳤을 때의 충격은 다음번 1등을 차지하기 전까지는 무엇으로도 회복시킬 수 없는 끔찍한 아픔이다.
술 좋아하는 사람에겐 기분 우울하다는 이유로 기분 좋은 술자리에서 물 들이켜는 것만큼 힘든 일도 없고 사람 좋아하는 이에게 운동량 지키기 위해 가고 싶은 모임 불참하는 것만큼 우울한 일도 없다.
넉넉하지 못한 지갑 사정 때문에 보고 싶던 후배 만나지 못하고 체지방 유지한다고 시원한 사이다 한 잔도 맘 놓고 못 마시는 일이 지금으로선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나 싶기도 하지만 '절대로' 좋아하는 내 삶에 있어서는 그것을 지키는 것 또한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었다.
얼마 전 혼술이라는 것을 큰 맘먹고 도전해 보았다.
야구중계 보면서 들이키는 맥주 한 캔의 여유를 술 배운 지 20여 년 만에 처음 시도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느낀 것은 그냥 시원했고 좋았고 세상은 아무 변화도 없었다는 것이다.
자의적인 결정은 아니었지만 취미로 하는 운동도 개수나 양에 연연해하지 않고 시간 되는 대로 즐겁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약속이 있으면 사람도 만나고 일이 있으면 하루 거르기도 하고 피곤하면 횟수를 줄이기도 하면서 말이다.
역시 내 몸도 세상도 운동 몇 번 거른다고 크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여유를 얻었고 사람을 찾았고 잃은 것은 그다지 없었다.
1등이야 애저녁에 집착 내려놓은 지 오래지만 무언가를 최고로 잘하려고 하는 마음도 최선의 만족을 무색하게 하는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절대로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그렇다.
나는 절대로를 지키기 위한 고집보다 그것이 깨어져도 받아들일 수 있는 융통성을 택하기로 했다.
나를 만드는 규칙들이 필요하긴 하지만 '웬만하면' 정도면 충분하다.
후배들에게 웬만하면 내가 밥을 사주지만 정 없으면 빈 지갑으로도 만날 수 있는 여유가 더 좋지 않겠는가?
웬만하면 즐거울 때 술 마시는 것이 좋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도 술 한 잔 즐길 수 있는 것도 괜찮다.
'절대로'라는 딱딱한 규칙보다 '웬만하면'이라는 조금 유연한 규칙이 지금 나에겐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