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난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어왔다. 여자 친구가 생겼을 땐 몇 벌 되지도 않는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며 외모에 신경을 썼고, 좋아하는 선생님 과목의 시험이 있는 날엔 밤을 홀딱 새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예뻐 보이고 싶고 나아 보이고 싶은 마음은 나를 노력하게 하고 그것은 실제로 나를 전보다 업그레이드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목표라고 하는 것이 꼭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목적에서 형성되는 것은 아니겠으나 적어도 나에겐 자기만족보다는 사랑하는 이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것이 그 달성을 위한 추진력으로 작용했던 적이 많다.
어릴 적 공부를 잘하고 싶었던 것은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부모님의 칭찬을 받고 싶어서였고, 운동을 열심히 하고 싶었던 첫 계기도 누군가에게 강하고 든든한 사람이 되어 보이고 싶어서였다. 장애를 받아들이고 점자를 익히고 지팡이 보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도 생각해 보면 어떤 이의 편지를 읽고 싶고, 누군가를 집 앞에 데려다주고 싶은 마음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언젠가부터 그 목표의 방향은 '앞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형태로 내게 찾아오기 시작했는데 나아지고 싶은 마음이 크면 클수록 그 마음은 간절했다. 내게 "너는 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이들이 제시하는 근거로 '보이지 않는 눈'을 말하는 경험의 횟수가 늘어나서였겠지만 실제로 내가 눈을 볼 수 있을지 없을지와는 별개로 그 간절함은 제법 강력하게 나를 나아짐의 방향으로 밀어주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취업을 할 때도 그랬지만 지금의 아내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당장 볼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너무나 보고 싶었고 왠지 그렇게 될 것 같았고 그것이 모든 것을 괜찮게 만들어줄 것 같았다. 그런 간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갑자기 시력을 회복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다행인 것은 그것이 나를 힘들게 하거나 절망하게 하지는 않았다.
볼 수 없다면 보는 방법 대신 다른 방법으로 보는 사람만큼의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 길을 찾았다. 현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고, 안된다면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시력 있는 이들만큼의 데이트를 만들려고 애썼다. 비록 그 결과물이 여전히 다른 이들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할지라도 적어도 나의 이전보다는 나아진 현재를 만들어낸 것은 분명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선택한 것이 다른 선택을 하지 않은 후회가 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세상 최고는 아닐지라도 내 노력의 방향만큼은 꾸준히 최고를 향하고 싶었다. 좋아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그 힘은 강했고 결과도 제법 괜찮았다. 연애하는 동안 그리고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내 모습이 보기에 괜찮았다면 그건 나를 나아지게 만든 목표가 되어준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또 하나의 나아짐 동력을 체험하고 있다. 햇살이의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먹이고 트림을 시키는 것은 매 순간이 첫 경험인 나에겐 도전의 연속이다. 나를 보고 활짝 웃어주는 녀석과 시선을 맞추고 싶고 좀 더 빠른 속도로 배고픔을 채워주고 싶은 마음은 또다시 시력 회복의 욕구가 꿈틀대게 만든다.
다른 아빠들보다 부족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다른 이들처럼 볼 수 있기를 바라지만 이젠 그 목표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도, 그 방법이 아니라도 좀 더 나은 아빠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잘 안다. 아기를 안는 것도 달래는 것도 이 녀석이 원하는 것을 알아채는 것도 보이지 않는 초보 아빠에겐 너무나 서툰 일이지만 난 분명 나아지고 있다.
아직 햇살이는 엄마의 품보다 아빠의 품을 어색해 하지만 어제보다는 덜 파닥거린다. 기저귀의 찍찍이를 찾아내는 시간도 쪽쪽이와 젖병을 입에 찾아 넣어주는 것도 몇 주 전보다는 빨라졌고 자연스러워졌다. 육아의 대부분을 엄마가 맡고 있긴 하지만 내 역할의 크기는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내가 좀 더 나은 아빠가 된다면 그건 내게 좋은 사람이라는 목표를 만들어준 사랑하는 아들이 있기 때문이다.
장애를 비장애로 만드는 것은 현실의 가능성에서는 불가능의 영역에 가깝다. 그러나 장애인의 삶은 조금 다른 모양으로 장애 없는 이들의 삶보다도 더 나아질 수도 있다. 어릴 적 좋아하던 선생님 과목의 시험 전날처럼 난 요즘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지만 그때처럼 즐겁다. 인터넷을 뒤지고 책을 살피면서 공부하는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하다.
새로운 도구를 찾고 몰랐던 방법을 알아내는 오늘도 난 어제보다 나아지는 중이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나를 움직여준 햇살이에게 감사하며, 나아짐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