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덕분에 요즘 동네 지인들이 많아졌다. 아들 친구의 아빠도 엄마도 때로는 선생님과도 사석에서 만나는 지인이 된다. 같은 시기를 보내는 아이들의 성장 이야기도 나누고 정보도 공유하면서 육아의 어려움을 한잔 술로 풀기도 한다.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으면서도 인사 한번 나눠본 적 없는 이들이지만 아이라는 공통분모는 너무도 빠른 시간에 우리들을 친한 사이로 만들어준다. 아이 이야기로 시작된 대화는 우리 부부 이야기를 거쳐 내 개인적인 생각과 요즘의 고민으로 이어진다.
어느 틈에 동네 친구가 되어버린 인연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다 보면 문득문득 깜짝 놀라게 되는 사실이 있는데 그들과 나의 나이 차이이다. 조금 늦은 나이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터라 아이 친구의 부모님들은 나보다 적게는 서너 살 많게는 열 살 이상 어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라는 사람이 특별히 권위적이거나 보수적인 편은 아니어서 몇 살 어린 후배들이나 더 어린 제자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나누고 사람을 사귐에 있어 나이를 전혀 의식하지 않기는 힘들다. ‘저렇게 이야기하는 걸 보니 어리긴 어리구나’, ‘어휴! 이렇게 어린 후배에게 하기엔 이런 이야기는 좀 그렇지.’ 하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새 가르침을 주려는 꼰대가 되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런데 햇살이가 이어준 새로운 인연들과의 자리에서는 그 부끄러운 꼰대 근성이 고개를 들지 못한다. OO어머니, OO아버지 하며 서로 존대하는 수평적 언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대화의 주된 주제인 육아 경력은 그들이나 나나 초보이기 때문에 에헴 하고 가르치려 해도 그럴 것이 없다. 그러다 보니 대화가 개인적인 이야기로 넘어가더라도 존중과 수평의 상태가 깨어지지 않는다.
평소 알고 지내던 너덧 살 어린 후배의 이야기였다면 귀담아듣지 않았을 아들 친구 아빠의 언어들 속에는 내가 놓치고 사는 삶의 지혜도 들어있고 조금 더 젊은 사람들의 새로움도 담겨 있다. 새 동네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는 그런 의미에서 배울 것들이 참 많다.
성인이라고 국가에서 인정한 스물 넘고 서른 넘은 사람들에겐 각자가 만들어온 소중한 삶의 역사가 있다. 겨우 몇 살쯤 더 많다고 해서 그들보다 모든 면에서 낫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 몇 가지쯤 더 경험해 봤을 수는 있지만 상대에게도 그 정도의 말할 거리는 충분히 많다. 더 어린 학생이나 어린이들에게도 그렇지만 나이나 직급 따위로 상대를 하대하거나 훈계하려 드는 것은 자기 배움의 기회를 걷어차는 뻣뻣한 꼰대가 되는 길이다.
나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모든 이는 내게 새로운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스승이다. 늦은 나이에 아들을 만난 덕분에 난 동네의 어린 스승님들을 여러분 모시게 되었다. 스승님들은 내 덕분에 장애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그 또한 나의 가르침 덕분이라기보다는 그들이 편견 없이 나를 대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모두 존중받아야 한다. 나이가 많거나 장애가 없거나 감투를 썼다 하더라도 항상 수평과 존중의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아들 덕분에 난 동네에서만큼은 꼰대 냄새를 털어내고 있다. 내게 좀 더 많은 스승님이 생길 수 있도록 후배와의 자리에서도 제자와의 자리에서도 존중의 자세를 유지하는 연습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