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나 미국처럼 서쪽 먼 나라를 다녀올 때 꼭 경험하게 되는 것이 시차적 응이다.
경도에 따라 해 뜨는 시간, 해 지는 시간이 달라서 낮과 밤을 느끼는 몸의 기능이 혼란을 느꼈다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는 기전을 말한다.
여행 많이 다니는 어떤 사람들은 하루정도 잠 안 자고 꾹 참고 극도의 피곤함으로 현지의 밤잠을 경험하게 되면 특별히 힘들 것도 없다고 말하기도 하던데 나를 비롯한 대다수에게는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래도 여행을 떠날 때 현지의 시간에 적응하는 것은 그래도 큰 어려움 없이 넘어갔던 듯한데 돌아오는 귀국길의 시차 적응은 그보다 10배쯤은 힘들었던 것 같다.
그에 관해 과학적으로 혹은 의학적으로 설명한 자료들도 있기는 하던데 내가 느끼기엔 그런 요인들 외에 심리적인 부분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떠날 때는 설렘과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들 덕분에 피로감조차 뿌듯함으로 느끼지만 돌아올 때는 여행의 끝이라는 아쉬움과 일상의 복귀라는 묵직한 책임 같은 것들이 같은 크기의 피로감을 몇 배로 증폭시키는 본능적인 무언가가 있는 듯하다.
이번 뉴욕의 일정에서도 그랬다. 이른 아침 늦은 밤 가리지 않고 이곳 저곳 돌아다니던 현지에서는 입에 맞지 않는 빵을 먹어도 큰 부담 없이 시간을 보냈는데 돌아온 일상에서는 하루를 꼬박 쉬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상 위에서 꾸벅꾸벅 졸거나 여기저기 뻐근함 느끼는 무거운 적응의 시간을 2주 정도 거쳐야 했다.
이번에도 그랬지만 내가 시차적응이라는 것이 감정에 따라 그 크기가 달라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것은 우리 일상의 여러 적응들에서도 비슷한 경험들을 느껴왔기 때문이다.
농담처럼 이야기하고는 하지만 교사라는 직업 가진 나는 1년에 두 번 정도는 방학이라는 긴 여행의 시차 적응을 겪는다.
삶의 리듬이 달라진다는 것은 방학식날이나 개학식 날이나 적응의 영역이긴 하지만 몸에서 느끼는 체감은 그 결과를 완전히 다르게 나타나게 한다.
오래전 학교에 입학하던 날과 졸업하던 날의 느낌도 큰 다름없는 차이로 내겐 다가왔던 것 같다.
낯섦에 대한 두려움은 언제나 새로움에 대한 설렘에 묻혔지만 끝이라는 아쉬움은 졸업이라는 뿌듯함을 넘어서서 긴 시간 새로운 적응의 시간들을 필요로 했다.
연애의 시간들도 그러했다. 모르는 둘이 만나서 서로에게 적응을 해 가는 시간은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참으로 피곤한 시간일 수밖에 없겠으나 그땐 밤샘 통화도 의도치 않은 삶의 변화들도 그저 즐거움일 뿐이었다.
반면에 모든 것에 대한 자유가 다시 주어지던 이별의 시간은 그 만남의 달콤한 적응에 크기가 크면 클수록 아픈 적응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살다 보면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새로운 적응의 시간들을 갖게 된다.
직장을 옮기기도 하고 오랫동안 살던 곳에서 이사를 가야 하기도 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떠나보내야 하기도 한다.
우연히 큰 것들을 얻게 될 때도 있지만 한 번에 많은 것을 놓치게 될 때도 있다.
새로운 설렘의 시간은 다시금 돌아오는 아쉬운 적응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뉴욕의 시간들은 가슴 뛰는 이륙의 시간으로 출발하여 너무 힘든 귀국의 시차 적응으로 끝이 났지만 그 모든 시간들은 이제 나에게 또 다른 경험이 되었고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걷게 될 많은 시간들과 장면들에 이런저런 모양으로 긍정적인 영향으로 작용할 것을 알고 있다.
새로운 입학들은 아쉽지만 영광스러웠던 졸업이 있었기에 가능했었고 조금 더 성숙한 만남들은 가슴 아픈 이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힘겨운 적응의 시간들은 아름다운 경험들을 온몸에 새기는 인고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시차적응이 두려워서 여행을 떠나지 않는다면 긴 여행에서만 얻을 수 있는 배움의 시간들은 포기해야 한다.
이별이 두려워서 만남을 도전하지 못한다면 뜨거운 사랑은 느낄 수 없다.
방학식날 개학날을 걱정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난 또 한 번의 시차 적응을 무사히 견뎌내었다.
뉴욕에서의 아쉬움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해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