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파일럿과 외과의사

by 안승준

난 현실주의자보다는 이상주의자에 가깝다.

교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학생들에게는 보수적인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있지만 개인적인 일로 한한다면 무모할 정도로 불가능은 없다고 말할 때가 많다.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서의 사회를 향한 반발심 같은 것으로 '나도 할 수 있다!' 를 외치게 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요인이긴 하지만 무모한 도전적 외침은 어릴 적부터 나를 둘러싸고 있던 천성이기도 하다.

절대 병에 걸리지 않는 약 만드는 의사가 될 거라고도 했었고 동네 마실 나가듯 우주여행 다닐 수 있는 엄청 빠른 우주선을 만들 거라고도 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고 가장 돈 많은 사람이 되고도 싶었다.

누구나 그런 생각 한 번쯤은 다 해 보는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다른 아이들과 좀 달랐던 건 내겐 강한 확신 같은 것이 있었다.

어떤 근거들이었는지 지금은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어떤 어른이 물어도 나름의 그럴듯한 논리 섞어가며 스스로의 꿈을 이룰 수 있는 포부를 밝히곤 했다.

물론 어리디 어렸던 나의 이야기들 속에서 과학적인 근거나 탄탄한 논리구조 따위를 찾아볼 수는 없었겠지만 무언가에 대한 확신 있는 의지만큼은 지금 생각해도 기특할 만큼의 도전정신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뤄낸 크고 작은 성과들 중 적지 않은 부분은 그런 모험심 덕분이었기도 하다.

장애를 가지고 나서도 그나마 평범함 정도의 삶을 누리고 살 수 있는 건 뭔가 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도전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점자도 독립적인 보행도 잘 안되던 새내기 장애인 때부터 왠지 대학 정도는 갈 수 있을 것 같았고 취업도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쪼끔은 유명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여전히 큰 근거 없는 확신들이었지만 그런 생각들 덕분에 그렇게 비슷하게 이뤄가며 살고 있다.

그런데 솔직히 고백하면 대한민국의 장애인으로 살아가면서 나의 무모한 도전정신들은 조금씩 그 날카로움을 잃어가고 있었다.

새로운 생각들과 도전들 앞에 놓이는 불가능의 두꺼운 벽들을 거치면서 현실의 직시라는 이름 아래 불가능은 존재한다는 인정의 영역을 조금씩 늘려갈 수밖에 없었다.

강연자로 무대에 서 있을 때는 여전히 시각장애인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단단한 확신은 조금씩 무너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뉴욕의 '비전'이라는 에이전시에서 만난 낸시는 어릴 적 천둥벌거숭이였던 나보다 더 한 발언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시각장애인은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컴퓨터가 발달한 요즘에는 더 그래요. 도전해 보지 않은 분야가 있을 뿐 할 수 없는 건 하나도 없어요."

내가 30여 년 전의 꼬마였다면 "맞아요! 멋지십니다!"라고 바로 동조했겠지만 이 세상에서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실제로 경험하고 살고 있는 30대 어른인 나에겐 약간은 듣기 거북스러운 발언이기도 했다.

미국인이라는 자부심 강한 시민활동가로서 어느 정도 강한 철학 정도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먼 타국에서 뉴욕의 현실적인 장애인 고용에 대해 공부하겠다고 날아온 대학생들 상대로 하는 한 기관의 대표의 발언치 고는 너무 과장이 심한 듯 보였다.

훌륭한 철학을 가지셨다는 의례적 인사를 건넨 후 도발적인 질문을 꺼냈다.

"그럼 대표님은 만약 시각장애인이 파일럿이나 외과의사 혹은 기관사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것도 가능하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의 철학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성 없는 그의 생각들을 지적하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의 대답은 나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고 있었다.

"파일럿과 외과의사를 하는 시각장애인들은 이미 많아요. 기관사는 도전하려는 사례가 아직 없긴 했지만 그것도 당연히 가능하겠지요."

직접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조종하고 환자의 수술을 집도하는 시각장애인들은 이미 유명 항공사와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는 말을 낸시는 당당한 목소리로 내뱉고 있었다.

컴퓨터와 여러 보조적인 장치들을 활용하면 그 일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말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난 뒤통수를 뭔가 묵직한 것으로 한 대 얻어맞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바로 어릴 적 나를 지탱하던 생각이자 힘이었다.

난 그저 생각만 했을 뿐이고 그들은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막연히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던 내 생각들은 현실로 존재하는 사람들의 스토리 앞에서 산산이 깨어지고 있었다.

난 여전히 시각장애인 파일럿과 외과의사를 만나보지 못했다.

그래서 아직은 조금의 의심마저 걷어내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뉴욕을 대표하는 '비전'이라는 에이젼시의 대표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으리란 것을 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나의 의심들이 더 부끄럽다.

세상을 바꿀 정도의 엄청난 일을 해낸 사람들의 시작은 엉뚱함과 무모함이었음을 자주 들어왔다.

사실 그것들은 처음부터 위대함이었겠지만 다수가 엉뚱함과 무모함이라고 단정했었을 뿐이다.

세상에는 오늘도 어제 없던 새로운 기술들이 발명되고 그것은 어제까지 불가능이라고 불리던 것들이었다.

우리는 꿈꿀 수 있는 자유가 있고 그 꿈은 무엇이든지 현실이 될 수 있다.

시각장애인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도 그렇다. 당신도 그렇다. 우리 모두 그렇다.

오늘부터 다시 한번 새로운 꿈을 꿔 보아야겠다.


참고영상: https://youtu.be/iIVLVLAbgs8


keyword
작가의 이전글뉴요커가 무단횡단을 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