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이 되면 왠지 기분이 좋다. 그런데 왜 그런지를 생각하면 조금 생각이 복잡해진다. 금요일 자체를 좋아하는 것인지 토요일 앞에 있는 요일을 좋아하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불타는 밤이나 주말에 만날 사람들과의 시간이 좋은 것인지 말이다.
초밥을 좋아하는 내 식성도 그 정확한 근거를 콕 집어서 찾아낸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부드러운 식감을 좋아하는지, 한 번에 간단히 먹을 수 있는 형태가 좋은 것인지, 몸에 좋은 음식을 먹는다는 느낌이 좋은 것인지, 그도 아니면 적당히 비싼 음식이 주는 좋은 음식 먹었다는 뿌듯함 임지는 정확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그 모든 요인들이 유기적이고 화학적으로 조합된 결과체이라고 이야기하겠지만 내 생각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어떤 금요일은 정말 극도의 피곤함이 끝나가는 한주의 끝자락이라서 기다려지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고 초밥이라는 음식 자체를 온몸에서 원하는 때도 있지만 실제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나의 뇌신경들은 초밥 앞에서 군침을 내보내라고 명령한다.
어쩌면 난 파블로프의 개나 식어버린 어느 연인들의 만남처럼 무조건적인 반사 행동으로 아무런 분석적 사고 없이 금요일과 초밥을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행인 것은 금요일이나 초밥 정도는 그것을 향한 맹목적 지지의 정도가 그와 관련한 근거의 신뢰도나 타당도와의 통계학적 인과 계수가 명확하지 않더라도 나의 삶이나 인류 전체의 존재들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초밥이나 금요일이 아닌 다른 문제라면 그것은 좀 많이 다른 이야기가 된다.
요즘 대한민국의 서울에서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수십만의 인파들이 광장이나 도로를 메운다. 양쪽으로 극하게 나뉜 그들의 주장들은 한치의 타협 가능성 없는 명확한 반대를 향한다.
그 나눠짐의 근거가 세대이건 출신지역이건 이데올로기이건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는 하다.
그리고 많은 다른 의견들의 부딪힘이 올바른 방향을 만들어내는 것 또한 나는 존중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그들의 외침이 깊은 고민과 생각들로 근거한다는 전제조건 안에서만 가능하다.
앞선 이 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그것이 어떤 신념과 사상을 가지는 것인지 결국 그런 생각들이 만들어 내는 세상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구호의 뒷 구절만 복창한다면 "우리 엄마가 더 예쁘다. 우리 아빠가 더 세다!"라고 떠드는 어린아이들의 다툼과 다를 바가 없다.
연일 몇 명이 모였는지 과장하고 본질과 관련 없는 다툼들이 오가는 sns를 보고 있으면 그 다툼의 종착지에 대한 염려를 아니할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아직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뿌리 깊은 왜곡적 사고를 안고 살아간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깊은 성찰과 관련했다기보다는 미디어나 구전의 여과 없는 수용이 반복된 습관성 각인의 결과이다.
여성이나 다른 소수들에 대한 혐오와 대립도 알고 보면 단순 무지한 편 나누기와 그것들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는 것들과 무관하지 않다.
당신이 짜장면을 좋아하는지 짬뽕을 좋아하는지는 나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짬뽕이 짜장면보다 좋은 수백 가지 괴변을 늘어놓더라도 웃으면서 들어줄 용의가 있다.
그렇지만 중국집 메뉴 고르는 수준으로 나라의 일에 간섭하는 것은 한 마디 하는 것부터 강력히 반대한다.
단순한 승패나 편 가르기의 규모에 관심이 있다면 야구장이나 축구장 관람을 권하는 바이다.
무지와 그릇됨으로 무장한 다수라는 집단은 이미 오래전부터 소수를 향한 차별과 사회적 폭력을 행사해온 괴물 같은 범죄 집단이다.
오늘 나의 생각을 말하고 싶다면 백번은 아니더라도 열 번쯤은 고민하고 공부하기를 바란다.
함께 모인 집단의 크기가 크다면 마냥 좋아하기 전에 그것이 만들어 내는 파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신중하게 고민하면서 행동하기를 바란다.
광장은 단순히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하는 가을 운동 회장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