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계속 가자
나는 궤도에서 이탈한 소행성이야. 흘러가면서 내 길을 만들 거야.
_개밥바라기 별(황석영)_
나는 늘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세상에 자취를 남길 수 있는 무언가가. 그러니까 나의 모든 선택은 더 나은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정상 궤도에서 조금씩 밀려나고 말았다. 삶이 조금 안정될라치면 나는 꼭 궤도에 어긋나는 선택을 함으로써 인생을 반쯤 꼬아놓고는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소연하곤 했다. 디자이너가 되고 싶지도 않았으면서 디자인 전문학교에 진학한 것,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자퇴를 한 것, 이름 모를 계간지라는 이유로 공모 당선을 포기한 것, 알 만한 회사의 명함과 월급을 뒤로하고 준비도 없이 퇴사한 것, 쥐뿔도 없으면서 이직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 누구도 나를 이 길로 인도하거나 강제한 적은 없다. 모든 것은 나의 선택이었다. 모든 선택은 더 나은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였다. 여전히 아무것도 되지 못했지만 아무튼 그랬다는 말이다.
브랜드 에디터로 일하며 트렌드의 최전선에 있으면서도 나는 늘 의문을 제기하는 쪽이었다. 왜 우리가 누가 정했는지도 모를 한 물살을 따라 다같이 휩쓸려야 하나요. 시키는 대로 하기 싫었을 뿐이지 나도 언제나 노력하고 있었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스스로 찾고 싶었을 뿐이다. 부모가 부자였다면 조금 달랐을까도 생각해 본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쓰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돈을 못 벌 것 같아서 디자인 전문학교에 진학했다. 잡지사 에디터가 되면 좋을 것 같았는데 잡지사 에디터도 돈을 못 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다시 대학에 가 잘 쓰는 법을 배우고 싶었는데 4년 동안 학비를 벌어가며 졸업까지 완주할 자신이 없어 포기했다. 월세를 내야 해서 취직했고, 대출금을 갚아야 해서 퇴사하지 못했다. 그러니 돈이 많았다면 나는 궤도에서 조금 덜 이탈하는 쪽의 선택을 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되돌아가 번복하고 싶은 선택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잘 한 선택이든 잘못 한 선택이든 그것이 운명이자 필연이었다고 믿고 넘어가는 일은 내가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다. 너덧 번은 족히 읽었던 책에서 처음 본 듯한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나는 궤도에서 이탈한 소행성이야. 흘러가면서 내 길을 만들 거야. 나는 이 문장을 내 것으로 만들기로 했다. 누구도 나를 궤도 밖으로 떠밀거나 내 손목을 붙들어 끌고 나온 적은 없다. 모든 것은 내 선택이었다. 그러니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궤도를 정상적으로 오르고 있는 사람은 그 길에서 낙오되는 것이 두렵겠지만 이미 궤도에서 떨어져나온 사람의 두려움은 딱 한 가지다. 나를 잃어버리는 것. 나를 나로 지켜내는 일이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사명이 되는 것이다. 나를 잃어버린다는 건 실패가 아니라 죽음이니까, 죽지 않기 위해 자꾸만 발악을 하는 것이다. 다시 정상 궤도로 돌아가려는 노력이 아니라, 흘러가면서 내 길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 없이 안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나를 몰아넣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 끝이 아니라고, 나의 길이 여기서 끝날 리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계속 가 보는 수밖에. 나는 이미 궤도에서 이탈했고, 내가 걷는 길은 어디나 뒷길일지도 모르지만, 내 발자국이 닿는 모든 곳이 길이 된다고 믿으며, 계속 걸어 나가 보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