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좋았거나 나빴거나 하는 건 단지 순간의 감정일 뿐이고, 어떠한 일은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기에 일어난다. 어쩌면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대부분의 사건들이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기에 일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를 지금 이 순간, 이곳에 데려다 놓기 위해 반드시 일어나야만 했던 실패, 좌절, 성취와 성공들을 떠올려 보라.
나는 웬만한 건 쉽게 필연으로 믿어 버리는 편이라 그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끝도 없겠지만 오늘은 왠지 그 모든 것들이 진부하게 느껴진다. 오랜만에 글을 쓰니 흰 바닥에 갈겨지는 모든 글자가 쓰레기처럼 느껴진다. 목차를 정해놓고 쓰는 일은 나처럼 게으른 필자에게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좀 더 체계적인 글쓰기를 해 보고자 시도한 일이었는데 대차게 실패했다. 내가 성급하게 싸질러 버린 글은 전부 엉망인 것 같고, 앞으로 써야 할 글은 이야기의 주인인 나조차도 지루해 졸음이 몰려 올 지경이다. 어쩌면 이런 깨달음이 지금 이 순간 나를 강타한 것은 쓰지 않는 내가 되기 위한 필연적 과정일 수도 있다. 이렇게 오늘도 나는 얄궂은 필연을 마주하는 걸까? 아, 이 끈질긴 필연이여!
사실 필연이니 운명이니 하는 것은 애초에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것들이라 끼워 맞추기에 따라 모든 것을 하나로 연결시킬 수도 있다. 내가 반쯤은 장난으로, 반쯤은 진심으로 하는 필연적 이야기 하나를 해 봐야겠다.
때는 약 15년 전, 나는 우연한 계기로 인해 아버지의 외도를 알게 되었다. 일순간 인생 첫 비극의 서막이 열렸다. 한동안 내가 비련의 여주인공인 줄 알았으나 사실상 비련의 여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나는 세상을 다 잃은 듯한 비련의 여주인공과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지만 확실하게 악당인 남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이 빌어먹을 집구석 다 좆 까라 그래!'를 시전 하며 반항 일로에 접어들었다. 밤거리를 헤매다 한 소년을 만났다. 오분에 한 번씩 입이 떡떡 벌어지는, 경악스러운 그의 가정사를 듣던 중 그가 말했다. '이래도 네가 제일 불행한 것 같니?' 난 그날의 대화 이후로 단 한 번도 스스로를 불행하다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상황은 점차로 더 나빠졌는데도 말이다. 모든 일이 엉망으로 뒤엉키던 날이면 늘 그날 그 소년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래도 네가 제일 불행한 것 같니?'
나도 누군가에게 그 소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줄곧 하곤 했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위로를 해 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흘러 한 남자를 만났다. 불행한 남자를. 그를 행복한 남자로 만들어 줄 자신은 없었다. 그러나, 당신이 제일 불행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려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함께 웃고, 함께 울었고, 결국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우리는 결혼을 약속했다. 우리가 함께라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확실히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와 결혼을 하고 약 7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문득 이렇게 얘기한다. 어쩌면 아버지의 외도는 너를 만나기 위해 필연적으로 일어나야만 했을 사건이었는지도 몰라.
지금 불행이라고 여기는 것, 지금 실패라고 여기는 것이 미래의 어떤 사건을 마주하기 위한 초석 인지도 모른다. 좀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한 발짝 물러나 세상을 바라보면 지금 나의 불행이나 실패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길 위에서 살다 길 위에서 죽을 것이다. 애초에 출발점이나 도착점 따위는 없는지도 모른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더니 바다 건너 다른 세상이 펼쳐지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