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2023 Record

서점의 일, 서점의 사람

2023년 2월 19일 일요일. 맑음

by 감우

내가 일하는 서점은 60년 넘게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래된 서점으로, 2대째 가업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보통 서점 주인을 상상하면 책을 사랑하는 독서가를 떠올릴 테지만, 일단 우리 사장은 전혀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니다. (그의 내밀한 속내를 알 길은 없으나) 내가 봤을 때 그는 책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처음에는 그를 보며 뜨악스러웠던 순간들이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사실 서점 주인으로는 그런 사람이 제격일 수도 있겠다. 책을 너무 사랑하는 서점 주인의 경우는 자칫 독서를 강요하거나 책을 읽지 않는 인간들을 은근히 멸시하며 젠체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책을 사랑하지 않는 서점 주인은 책을 철저히 상품의 하나로 대하며 모든 손님에게 친절하다.


서점의 직원들은 대체로 책을 사랑한다. 종일 책 속에 파묻혀 일을 하면서도 퇴근길에 책을 사들고 돌아간다. 서점의 월급은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박한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쉽사리 서점을 떠나지 못한다.


서점 일은 상상 속에 그리는 것과 현실의 간극이 매우 깊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공간에서 조용히 책을 읽다가 손님이 오면 자연스럽게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류의 분위기는 일종의 서점 판타지라고 볼 수 있다. 서점의 일은 고상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차라리 육체노동에 가깝다. 하루에도 수백 권의 책이 매일 서점으로 들어온다. 그것들을 다 정리하고 나면 산처럼 쌓인 반품 책들을 싸 날라야 한다. 손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 번에 우르르 들어왔다 우르르 빠져나간다. 서점에 오래 머무는 손님일수록, 책을 구매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서점에는 갖가지 진상들이 득실거리는데, 육체노동에 감정 노동까지 곁들여지면 피로도가 급격히 상승한다. 그래서일까? 내가 이곳에서 일한 기간은 고작 6개월 남짓인데, 그사이 그만둔 직원들의 수가 무려 여덟이다. 이렇게까지 퇴사율이 높은 직장은 이제껏 본 적이 없다. 그래도 책이 안 들어오는 주말은 비교적 한가한 편이라 나름대로의 서점 판타지를 충족시킬 수 있다. 오늘은 특별히 기억에 남을 만한 진상 손님도 없었거니와 그냥 손님 자체가 별로 없던 날이라 반 정도 남은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서점 일은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무한대로 증식시키며 일거리를 만들 수 있지만, 또 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으면 아무것도 안 하더라도 큰 지장이 없다. 서점 일이란 것은 어차피 시작도 끝도 없이 언제나 진행형이다.


나는 진상 손님을 보더라도 크게 스트레스를 받는 편은 아니다. 사무실의 진상은 아침부터 밤까지 내 옆에 있다가 다음날 또 얼굴을 맞대야 하지만, 손님들은 아무리 대단한 진상이라 하더라도 결국엔 돌아서 나가게 되어 있다. 그 잠깐을 참는 것은 일도 아니다. 회사 생활에 비하면 이곳은 스트레스 프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나는 서점의 일과 서점의 사람들에게 큰 불만이 없는 편인데, 그래도 역시 이 돈을 받고는 어떤 미래도 도모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이곳에서 영영 일할 생각은 없고, 무슨 일이 있어도 올해는 사장이 되어 볼 참인데, 그래도 이곳에서 일하기로 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 (지극히 개인적인) 이주의 주목할 만한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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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서점에서) 밑줄 친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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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슐츠 <예술가가 되는 법>


\ 오늘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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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롱블랙 인사이트 기록, (우)화이트 노이즈 영화 시청 기록

오늘 서점이 얼마나 한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간 밀려 있던 롱블랙 노트 네 개를 몰아 읽고 기록했다.


\ 새로운 취미_오늘의 필사

698521789.691269.JPG 김경인 시집 <한 밤의 퀼트> 중 '수요일의 여행'

딥펜과 잉크가 온 후로, 매일 꼼지락거리며 뭔가를 끄적이고 있다. 아직은 친해지는 단계. 나는 필기체를 못 쓰는데 딥펜으로 글씨를 쓰면 신기하게도 (B급이긴 하지만) 필기체 비스무리한 글씨가 써진다. 오히려 반듯하게 쓰는 것이 더 어렵다.

시를 어려워하는 편이라 딥펜으로 시 필사를 해 보기로 했다. 글씨를 잘 쓰고 싶어서 <딥펜으로 쉽게 배우는 한글 캘리그라피>라는 책까지 구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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