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2023 Record

2023년 3월 8일 수요일

휴무

by 감우
우리는 보통 시간이 단순하게, 기본적으로 어디서든 동일하게, 세상 모든 사람의 무관심 속에 과거에서 미래로, 시계가 측정한 대로 똑같이 흐른다고 생각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주의 사건들이 과거와 현재, 미래의 순서대로 벌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과거는 정해졌고, 미래는 열려 있고...
하지만 이 모두가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 오늘 책을 읽으며 밑줄 친 문장 중 가장 기억할 만한 하나를 골라 글머리를 열기로 했다(본문 내용과는 상관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전혀 없을 수도 있다). 위 문장은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10p


14년 지기 친구의 집을 방문했다. 친구들 중 가장 먼저 엄마가 되었는데, 그 아기가 태어난 지 일 년 하고도 11일이 지났다. 첫 만남에서는 나랑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비로웠는데, 오늘은 (아직 2족 보행은 못하지만) 앉기도 하고 서기도 하며 인간 흉내를 제법 내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기어 다니는 아기가 그렇게 빠른 지도 처음 알았다. 마치 한 마리의 물고기가 바다를 헤엄치듯 엄마 뒤를 쫓아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닌다.


아기 키우는 일은 가장 힘든 한 가지를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전반적인 모든 것이 고되고 지치는 작업이라고 친구는 말했지만, 그 과정을 겪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부모 자식 관계가 만들어지는 그 과정 자체가 (아무리 고되다 하더라도) 신비로워 보였다. 아기는 종일 엄마만 바라보고 엄마만 쫓아다니고 엄마를 끌어안고 어쩔 줄을 모르는데, 생각해 보면 그런 종류의 사랑은 내가 낳은 아기만이 줄 수 있는 유일한 종류의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48페이지까지 읽었다. 한글을 읽을 수만 있다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인데, 한글을 읽을 줄 안다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책은 아닌 것 같다(자연과학 도서들 중에는 한글을 읽을 줄 알아도 전혀 읽을 수 없는 책들이 생각보다 많음). 그래도 주석이 매우 상세하고 친절하게 달려 있어 읽다 말고 집어던질 정도의 수준은 아니다. 사실 오늘 읽은 분량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장은 따로 있다.

우리가 지금 하는 말도 시간이 자신의 전리품으로 이미 가져갔으며,
되돌릴 수 없다.*

다만 위 문장은 이 책의 저자도 인용한 문장이라, 인용을 인용하는 것은 좀 아닌 것 같아서 글머리는 다른 문장을 골랐다. 위 인용문의 주석은 책의 주석을 동일하게 삽입하는 게 좋을 듯하다.

* 이 책, 각 장의 시작 부분에 인용한 글은 줄리오 갈레토가 번역한 <이 작은 원 안에서>라는 아주 짧지만 매력적인 책에 담긴 내용 중, 호라티우스의 <송가>에서 따온 것이다. (1권 11편)


어제는 계획대로 <서점 일기>를 다 읽었다. 마지막에 에필로그가 추가돼 있는데, 약간의 반전이 담겨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왠지 모르게 조금 슬퍼졌다.


집에 돌아와 보니 택배 상자가 쌓여 있었다. 잉크, 만년필, 딥펜 닙 등등을 잔뜩 샀는데 드디어 도착! 하나씩 다 써 보다가 이 시간이 되었다(지금 시간, 3월 9일 새벽 3시 39분). 장시간 딥펜과 잉크를 붙들고 여러 실험을 거쳐 본 바, 딥펜 닙은 브라우스보다 닛코가 훨씬 좋은 것 같다. 브라우스 닙이 안 좋다기보다는, 닛코는 길들이기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바로 좋은 필기감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 테 잉크를 경험하고 싶어 몇 개 담아 봤는데, 테 잉크는 일단 종이를 좀 더 타는 듯하고, 만년필에 펜입하여 쓰는 것보다 딥펜으로 썼을 때 그 진가가 더욱 발휘되는 듯하다.

내일은(사실은 오늘) 또 출근을 한다.


오늘 배송 온 물건들. 쿠오트의 펜 레스트도 오늘 배송 온 물건 중 하나.

(좌) 일단 원래 갖고 있던 스테노 닙으로 잉크 시필을 해 보았다. (중) 브라우스 No.180 닙도 사용해 보았는데, '테를 잘 볼 수 있음'이라고 적었지만 그렇게 잘 볼 수는 없음. 사진도 아이폰 기본 카메라 선명하게 필터 적용 후 조명까지 때려서 저 정도. (우) 오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읽고 밑줄 친 문장들을 닛코 G닙을 이용해 필사해 보았다. 날짜별 밑줄 문장을 제대로 기록해 볼까 고민 중.



여기 올리는 글들은 언제나 쓰고 나면 마음에 안 들고, 이런 걸 왜 올리나 싶고, 세상 지루해 보이고, 아무도 안 읽을 글을 여기에 왜 올리고 있나 싶어서 자괴감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쓰고 그래도 올리려 한다. 일단 꾸준하게 하트를 눌러 주시는 몇몇 착한 분들이 계시기도 하고(감사합니다.. 진심으로...), 중간쯤 하다가 마음에 안 들면 중간쯤 하던 것까지 다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해야지 하다가 아예 안 해 버리는 게 거의 습관 수준이다 보니, 이번엔 중간중간 고치고 바꿔가면서 꾸준히 쓰는 경험을 가지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려 한다. 이런 류의 기록성 글은 하나씩 떼어 놓으면 쓰레기 같아도 모아놓으면 꽤 괜찮을 수 있다는 희망도 조금은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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