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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우 Nov 25. 2016

디자이너 남편과 산다는 것 2

호주에서의 삼 개월.

 퇴사를 결심한 그와 퇴사 이후를 고민하다 신랑이 먼저 장기여행을 떠나보자는 제안을 해왔다. 모험을 즐기는 성격이 아닌 걸 알기에 나는 잠시 놀랐지만 늘 나그네가 되기를 갈망해왔던 나는 그의 제안이 채 끝나기도 전에 덥석 물었다. 어 그럴까?! 어디로 갈까? 언제 갈까?

 그러나 현실은 알량한 퇴직금 몇 푼과(꽤 목돈이었으나 장기여행의 경비로 보자면 소박하기 그지없는 액수였다.) 집에 묶여있는 보증금이 우리가 가진 재산의 전부였기에 호주 워홀을 제안한 것은 나였다. 그럼 우리 나가서 돈도 좀 벌고 여행경비라도 마련해서 여행이나 맘껏 하다 올까? 처음에는 좋다고 맞장구를 치던 신랑은 그날 이후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부침개 뒤집듯 말을 바꿨다. 역시 안 가는 게 낫겠어. 경력도 단절되고..(이하 생략) 아니야 가자!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오겠어! 며칠을 이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나도 조금은 짜증스러워졌다. 호주에 있는 친구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나 가, 나 못가를 반복하다가 결국엔 그렇게 가고 싶으면 혼자가라는 남편의 말에 그냥 안 가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는데 시할머니의 장례를 치루도 돌아오는 길에 신랑이 우리 호주 가자 하고 말했다. 그렇게 가자고 졸라댔던 나였는데 안 가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이고 보니 이젠 내가 덜컥 겁이 났다. 아니 갑자기 왜.. 많이 생각한 거 맞아..? 그렇게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신랑은 결심했다며 단호했고 나는 뭐 원래 가고 싶었으니까.. 뭔가 결정이 되면 추진이 빠른 나와, 간만에 (거의 내가 그를 알고 난 이후 처음으로) 굳은 마음을 먹은 신랑이 만나 속전속결로 워홀러가 될 준비를 시작했다. 신랑은 한국을 떠버린다는 좋은 구실로 당당히 퇴사를 선고했고, 우리는 한날한시에 백수가 되었다. 급히 집을 내놓고, 그동안 공들여 사모았던 모든 가구들과 대부분의 집기까지 한 번에 넘겨버리며 한순간에 집 청산이 끝났다. 시댁과 친정에 일주일씩 머물며 일 년간의 이별인사를 톡톡히 하고 결혼 전부터 미뤄왔던 제주도 여행을 3박 4일간 다녀온 뒤 우리는 비행기를 탔다. 친구네 집에서 함께 쉐어를 하기로 했으므로 우리는 별 탈 없이 도착해 안정적으로 짐을 풀었고, 발 벗고 도와주는 친구 덕에 매끄럽게 호주 생활에 안착할 수 있었다. 돈이 목적은 아니다 보니 처음엔 여유롭게 여행 온 듯 하루하루를 보냈으나 신랑의 심리상태가 또다시 널뛰기를 시작했다. 경력 단절의 불안감과 영어울렁증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신랑은 꽤나 인정받는 디자이너였고, 회사에서도 다시 돌아오라는 연락을 수시로 해오는 상황이었다. 돌아갈 곳이 있고, 잘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머나먼 타지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상황에, 설거지나 청소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를 한편 이해했고, 한편 답답했다. 워홀을 제안했던 내 발등을 찍었고, 가자고 한 신랑을 원망하고도 싶었다. 2년여를 함께 살면서 그다지 싸울 일이 없었던 우리는 호주에서의 첫 한 달을 거의 매일 싸웠다. 그 지난한 싸움이 지속되던 어느 밤, 우리는 일단 일을 구해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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