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무_컴백 홈
내 청춘은 캄캄한 폭풍우에 지나지 않았구나.
여기저기 찬연한 햇빛이야 몇 줄기 뚫고 들어왔지.
천둥과 비바람 그리도 모질게 휘몰아쳐
내 뜰에 빨간 열매 남은 것 별로 없다.*
시댁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 행사를 치르고 나면 이상한 보상 심리가 생긴다. 용산역에 내려 유니클로에 들렀다. 싸다고 담다 보니 결제 금액이 20만 원을 훌쩍 넘었다. 믿기지 않아 영수증을 찬찬히 살펴보았는데, 전부 내가 산 것들이 맞았다. 집에 와서 하나씩 다시 입어 봤는데, 구매가 후회되는 상품은 없었다. 봄 옷 마련을 끝냈더니 날씨가 나를 배신하며 추워지고 있다.
저녁으로는 고기국밥을 배달시켜 먹었고, 고양이 간식을 잔뜩 주문했다. 시댁에 다녀오면 이상하게 돈이 쓰고 싶어 진다니까?
남편이 시댁에 핸드폰을 두고 왔다. 평소 그런 실수를 하는 쪽은 대체로 나였는데 말이지. 내가 조금 놀렸더니 남편이 약간은 시무룩해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를 챙겨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핸드폰은 택배로 받기로 했다. 핸드폰 중독자인 남편이 핸드폰 없는 며칠을 잘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다. 잠들기 전 아이패드로 알람을 맞추며 남편이 말했다.
"나는 내일부터 통신 두절이야."
아침에 시댁 거실에서 [안세영 vs 허빙자오] 배드민턴 경기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정적 속에서 역동적인 몸짓으로 셔틀콕 랠리를 이어가는 선수들을 보니, 어쩐지 고독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고독해 보이지 않아요?"하고 소리 내어 말했는데, 내 말에 대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는 책을 읽는 대신 야구를 봤다. (우리나라, 축구는 못해도 야구는 잘하는 거 아니었나요..?) 내가 기억하는 WBC는 2009년 고등학교 교실에서 다 같이 봤던 결승전이다. 무려 고3이었는데도, 담임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중계를 틀어줄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더랬다. 2023 WBC는 8강 진출도 힘들지 싶다.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니 손흥민 선수가 PL통산 99호 골을 터트렸다는 알람이 스포티비로부터 날아왔다.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한 일은 [토트넘 vs 노팅엄]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는 일이었다. 2022 월드컵 이후 축구에 관심이 생겨 스포티비에 가입했는데, 참 얄궂게도 손흥민 선수는 꼭 내가 중계를 보지 않는 날만 골을 넣고 있다. 어쩌면 내가 중계를 보지 않아서 골을 넣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내 맘대로) 보상 데이이므로, 저녁 일정은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 하나를 하기로 했다. 그것은 바로 딥펜 연습! 야심 차게 자리를 깔고 시작했는데 글씨는 내 맘대로 안 써지고, 점점 짜증이 났다. 나에게 보상을 주려다 스트레스를 얻었다. 며칠 전 서점에 악필 교정 책이 입고되어, 입고 직원 O와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 "이 책을 사면 정말 글씨를 잘 쓸 수 있을까요?"
(O) "아니."
"단호하시네요."
"내가 그 책 샀거든."
"글씨를 처음 배울 때 잘 배웠어야 했는데 말이에요."
"맞아, 다 때가 있는 거야. 우린 이미 틀렸다는 거지."
나는 기. 승. 전. 결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변주되는 '이야기'에만 마음이 동하는 병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시를 즐기지 못하고, 심지어 음악도 즐기지 못한다. 뮤지컬을 사랑해서 한때 뮤지컬 배우를 꿈꾸기도 했었는데, 콘서트에 가서 마음이 떨려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즐기지 못하는 것뿐 동경하는 마음은 가지고 있어서 시 필사를 하기로 했다. 뭘 느껴야겠다는 마음보다는 그냥 글씨 연습한다 생각하며 별생각 없이 글자를 따라 적는데, 반복해서 쓰다 보면 행간의 의미가 조금 이해될 것 같은 순간이 있다. 이럴 때 나의 예술적 감각이 진일보한 듯한 기분을 느끼곤 한다. 바로 오늘이 그런 기분을 느낀 날이다. (그런데 '기분을 느끼다'라는 말이 맞는 표현인가..? 갑자기 이상하게 느껴진다.)
* 민음사 세계시인선 7, 악의 꽃 (샤를 보들레르) 중 <원수>의 첫 문단
-> 지금까지 보았던 청춘에 대한 묘사 중 가장 좋았다. 자꾸 곱씹어 보게 되는 문장이다. 그래도 역시 시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