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2023 Record

2023년 3월 23일 목요일

출근

by 감우
저주와 특권이 더도 덜도 아닌 같은 것이라면 고상한 것과 천한 것 사이의 차이점은 없어질 테고, 신의 아들이 똥 때문에 심판받는다면 인간 존재는 그 의미를 잃고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그 자체가 될 것이다.*

3월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이곳에 뭔가를 적어 올리기로 다짐했는데! 어제는 잠깐 소파에 기대앉는다는 것이 눈을 떠 보니 아침이었다. 어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 읽은 날이기 때문에, 특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었는데 말이다.



오늘은 꼭 여름이 오기라도 한 것처럼 후덥지근한 기운이 종일 이어졌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서점은 더욱 한산한 채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니 오늘은 어제의 이야기를 좀 더 해도 좋을 것 같다.


오랜만의 자유를 맞이한 22일, 눈을 떠 시계를 확인하니 오전 10시 50분이었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 앉아 WBC 결승 중계를 틀었더니 7회 초 경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스코어는 3:1, 일본이 이기고 있다. 2점 차라면 9회 말까지 충분히 뒤집힐 수 있는 정도이기에 앞부분을 놓친 것이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휴무 전날인 화요일, 나의 동료 M이 오타니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줬다. 그녀는 긴 말은 하지 않고 오타니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오타니는 인간이 아니에요."

M의 말마따나 오타니 선수는 타자석에서 배트를 휘두를 때는 언제고, 마무리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메이저리거의 소속팀 동료이자 주장이기도 한 마이크 트라웃을 삼진으로 잡으며 일본의 우승에 크게 일조했다. 오늘 출근을 했더니 M은 또 이런 말을 남겼다.

"오타니를 알게 되면 이제 오타니 외에는 그 누구도 좋아할 수 없게 될 거예요."

그녀는 오타니 선수에게 빠져도 단단히 빠진 것 같다.


야구 경기가 끝나고 샤워를 했다. 아무런 약속은 없지만 머리를 세팅하고 화장까지 곱게 한 뒤에 두꺼운 책을 두 권이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달러구트 꿈 백화점') 싸들고, 심지어 아이패드까지 챙겨서 집을 나섰다. 그때의 시간은 대략 오후 2시 30분쯤. 원래 집 앞 카페(한 잔만 더 마시면 쿠폰 열 개를 다 채울 수 있는!)를 갈까 하다가, 날씨가 너무 포근해서 조금 걷기로 했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언젠가 한 번 가 봐야지 했던 테라스 카페로 들어가 맥주를 한 병 시켰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베토벤 협주곡 5번 "황제" 2악장을 플레이시킨 뒤,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일전에도 말했듯 난 음악을 사랑하지 못하는 소울 없는 인간이지만, 저 순간에는 왠지 베토벤의 음악을 들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마지막 장을 덮었다. 카레닌이 죽었을 때 조금 울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함께 가져간 <달러구트 꿈 백화점>을 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이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아직은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가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짐을 챙겨 들고 카페를 나와 시선을 대상 없는 먼 곳에 던져두고 휘적대며 한참을 걸었다.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읽고 싶다는 욕구가 나를 유혹했다. 그러나, 그런 식의 회귀도 답은 아니다.


나는 왜 이 복잡하고 지난한 이야기에 이토록 매료되었을까. 그 이유를 오늘의 글머리 문장에서 찾을 수 있었다. 시제도, 시선도 복잡하게 변주하며 내달리는 516쪽의 긴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우리가 쫓는 모든 것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상기시킨다. 작가는 사랑과 폭력, 배반과 정조, 불안과 행복의 대치되는 단어들을 끊임없이 한 점으로 모아 접붙이며 현기증 나는 진공의 소용돌이 속으로 독자를 몰아넣는다. 결국 모든 의미는 사라지고, 그곳에 우리가 외면하려 했던 진실이, 참을 수 없이 가벼운 형태로 희미하게 남아 있다.


감명 깊이 읽은 책일수록 그에 대한 감상을 남기기 어려워진다. 이 책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틈이 날 때마다 고민했는데, 자꾸만 이 문장이 머릿속을 맴돈다.


"모든 삶은 가까이 다가설수록 짙어지는 비극이나, 그 비극이 반드시 무거울 필요는 없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398p_6부 대장정中

이 문장에서 말하는 신의 아들이란 스탈린의 아들 야코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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