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2023 Record

2023년 3월 25일 토요일

휴무

by 감우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이불 빨래를 했다. 세탁기 없는 집에 산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이사를 하며 집이 좁아졌고, 베란다에는 배수로가 없었다. 다행히 빨래방은 가까웠고, 별 고민도 없이 '빨래는 빨래방 가서 하면 되지!'하고 생각했다. 고양이를 세 마리나 키우다 보니 옷 하나하나 돌돌이를 밀어 개는 일이 여간 고생스러운 게 아니었던 터라 내심 잘됐다 싶기도 했다. 하지만 집은 엘리베이터 없는 5층이었고, 한 번에 몰아서 빨래를 하다 보니 어깨가 빠지도록 무거운 빨래가방을 들고 오가기에 빨래방과의 거리는 결코 가깝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결국엔 다 살게 되어 있다. 현관이 없는 집에서도, 세면대가 없는 집에서도, 세탁기가 없는 집에서도, 나는 잘 살아냈고 또 살아내고 있다. 인간은 대체로 결핍을 거름 삼아 성장한다. 이제 나는 세탁기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능력치 하나를 추가로 획득했다.


그래도 만약 다시 이사를 가게 된다면, 세탁기는 물론이고 건조기까지 들이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이불을 자주 빨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오늘 이불의 오염 정도를 보고 받은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빨래방 갈 때는 책을 꼭 챙겨 가는데, 오늘은 <안나 카레니나>를 들고 갔다. 나는 1권만 소장하고 있는데, 이 두꺼운 책을 무려 세 권이나 읽어야 한다니! 생각하면 아득하긴 하지만, 의외로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생각해 보면 톨스토이의 책은 대체로 다 그랬던 것 같다.


우리 집 고양이들은 웬만해서는 사고를 치는 법이 없고, 벽지를 뜯는다거나 하물며 책을 망가트리는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유일하게 <안나 카레니나>의 표지만 야무지게 찢고 씹고 뜯어놨다..! 한동안 방치됐던 책을 꺼내 보니 그 모양이라 오늘 약간의 보수 작업을 거쳤다. 찢어진 곳을 풀로 붙이고, 마스킹 테이프로 한 번 마감한 다음, 서점에서 챙겨 온 책 비닐로 포장했다. 반창고 붙인 티가 나긴 하지만 봐줄 만한 정도가 되었다.


느지막이 집에 돌아와 빨래가방을 부려두고 남편과 집 근처 카페에 가서 수플레 펜케이크를 먹었다. 남편에게 꽁돈이 생겼을 때는 즉시 알겨 먹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우리는 요즘 어딜 가나 상권 분석 비슷한 것을 하고, 잘되는 집과 안 되는 집의 한 끗 차이를 찾기 위한 대화를 나눈다. 사업을 시작할 준비가 조금씩 되어가고 있다.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준비는 오직 마음의 준비뿐이라고, 행동에 옮길 결심을 할 수 있다면 준비는 끝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후에 닥쳐 올 여러 난관과 변수에 대해서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대응할 일이다. 미래에 대한 걱정의 무의미함에 대해 요즘 부쩍 느끼고 있다. 걱정했던 일들은 대부분 일어나지 않고, 언제나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튀어나온 다. 그러니까 어차피 미리 걱정해 봤자 그런 건 아무 쓸모가 없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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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한 접시에 무려 18,000원짜리 수플레 펜케이크!, (우) 나름 감쪽같아진 보수의 결과물



* (너무나 유명한)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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