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2023 Record

2023년 3월 29일 수요일

출근

by 감우

한강 잔디밭에 하루 종일 누워 있고 싶어지는, 완연한 봄 날씨가 만개한 하루였다. 서점 앞에 벚나무는 작은 가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꽃을 틔웠다. 벚꽃이 인기가 많은 이유는 짧은 수명 때문이겠지. 꽃이 절정에 이르렀으니 이제 질 일만 남았다. 벚꽃이 떨어지고 푸른 잎이 돋아나면, 곧 여름이 올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새벽녘 이 창을 열 때까지, 수시로 이곳에 어떤 이야기를 쓸지 생각하지만, 하얀 창을 열고 나면 이상하게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은 전혀 생각지 않았던 이야기를 쓰게 되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 뭔가 쓰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


참! 오늘 서점에서 그래픽 노블 <쥐>의 앞부분을 조금 읽었다. 표지도 비호감이고, 그림체도 딱히 호감은 아니지만, 흡입력이 상당히 좋은 책이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인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린 만화로, 역사적 배경이 담긴 실화를 바탕에 두고 있다. 서점에 재고를 가지고 있다가 몇 년 동안 한 부도 팔리지 않아 얼마 전 반품을 보냈는데, 어제 손님 주문 건이 발생해서 오늘 다시 입고되었다. 예약 손님이 게으른 편이라면, 내일도 좀 더 읽어 볼 수 있겠지.

나치의 유태인 학살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사실을 마주할 때마다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와 관련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 한 문장을 공유한다.


범죄적 정치 체제는 범죄자가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다고 확신하는 광신자들이 만든 것이다.


이런 것들을 보다 보면 우리가 흔하게 사용하는 '인간적으로 살자'라든가,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러니'같은 말이 얼마나 하찮고 우스운지 새삼 깨닫게 된다. 오직 인간만이, 인간이라는 이유로 야만을 불사한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의 명대사 "명분이 없다 아닙니까, 명분이"는 왜 오직 인간만이 지독한 악으로 물들 수 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의 명분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범죄의 당위성을 부여하고, 그로 인해 모든 비극이 초래된다. 히틀러가 죽고 소련이 망해도 이 땅에 유토피아는 오지 않았다.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다고 확신하는 광신자들은 여전히 우리와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고 있다.


밀란 쿤데라의 비관주의자와 낙관주의자의 차이에 대한 이론을 떠올려 볼 때, 내가 비관주의자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인간은 악에 대한 욕망을 이성으로 억누르고 있을 뿐, 언제나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악을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나도, 그리고 당신도.




<안나 카레니나>를 계속 읽고 있다. 내일은 얼마 전 구매한 <스토너>를 서점에 챙겨 갈 예정. 어제오늘 서가 정리를 한답시고 너무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내일은 해야 할 일만 하고 일을 만들어서 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래픽노블 <쥐>의 표지, 아마 곧 살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감우 인스타그램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023년 3월 28일 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