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육체적 사랑만 아는 사람들이 꼭 쓸데없이 드라마를 운운해. 그런 사랑에 드라마란 있을 수 없어. 그리고 플라토닉한 사랑에도 드라마는 있을 수 없어. 그런 사랑에는 모든 것이 분명하고 순수하기 때문이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은 뒤로 약간의 허무주의에 빠졌음을 고백한다. 우리가 갈망하는 모든 것은 실체 없는 허상이고, 평생 무언가를 쫓으며 살지만 결국 어느 것도 온전히 소유할 수 없을 거라는 쪽으로 마음이 자꾸만 기울고 있다.
가지지 못한 것을 갈망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과도 같다. 불안의 파도 속에서는 안정을 소망하고, 안정의 고요 속에서는 불안을 그리워한다. 우리가 '행복'이라는 개념을 사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져 본 적도 없고, 가질 수도 없으며, 애초에 실체조차 없는 개념 그 자체인 것. 한 발 다가서면 두 발 멀어지는 영원한 신기루와도 같은 그것은 가지지 못한 것을 갈망하는 인간의 본능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인간은 결코 행복을 소유할 수 없을 것이다. 가진 것에 만족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므로.
오늘은 여유롭게 책이나 읽으며 하루를 보내려 했지만, 신간이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결국 또! 서가 정리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들어오는 신간의 양에 비해 서가가 너무 부족하다. 책이 서가에 꽂히지 못하고 창고로 올라가는 순간 그 책은 사실상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 서점은 사형수들이 너무 많아 창고 자리조차 부족한 지경에 이르렀다. 미디어 지옥에 빠져 책을 읽지 않는다고 소비자들을 탓하기엔, 너무 많은 책을 생산해 내는 출판사들도 반성이 필요해 보인다.
어제 읽다 만 <쥐>를 좀 더 읽었다. 담담한 어조로 전해지는 참상의 실체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끔찍했다. 사랑하는 가족이 눈앞에서 끌려가고, 살기 위해 부모를 팔아넘기고, 어린 자식들에게 직접 독약을 먹여야만 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 진창에서 살아남았다한들, 그들을 과연 살아남은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상황에서든 죽는 것보다는 사는 쪽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내가 당시의 유태인이었다면 나는 살기보다 죽기를 바랐을 것 같다. 끊임없이 조여 오는 공포를 견뎌낼 자신이 없다. 읽는 내내 가슴이 답답하고 구토 욕구가 일었다. 아직 아우슈비츠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이 책은 사야 할 것 같다.
* <안나 카레니나 1>_98p, 레빈의 이야기
'드라마'도 결국 실체 없는 허상에 불과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