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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우 Dec 26. 2016

가난이라는 값진 경험

여러분의 수저는 무슨 색인가요?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중 여러분의 입엔 어떤 수저가 물려있나요?


 개인적으로 이런 질문을 소위 극혐 하지만 그래도 대답해야만 한다면 나는 흙수저로 태어나 아주 잠깐, 은수저는 못 돼도 구리 수저는 되나 했다가 다시 흙만 한가득 입에 물고 있는 자타공인 흙수저라 하겠다.


 사실 흙수저의 기준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내가 이러한 질문, 혹은 수저 논란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도 이와 일맥상통하다고 할 수 있겠다.

 수저 논란이 이슈화되면서 스스로 나 금수저야, 은수저야 하고 생각하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그리고 그 수저의 기준이 왜 경제적인 기준으로 국한되어야만 할까.

 나는 가난을 즐기는 마조히스트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돈이 행복을 좌우할 수 있냐 하면 절대 아니다 라고 당당히 대답하겠다.


 나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 동안 돈이 없어 보일러를 떼지 못하며 살았다. 돈이 없어 계란 10구를 사는데도 여러 번 생각해야 하는 시간을 엄마와 함께했다. 부모님의 이혼과 함께 찾아온 경제적 고비였다. 그전까지는 유복했냐 물으신다면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까지는 퍽 괜찮은 생활을 했다고 할 수 있겠다. 방학 때 해외로 어학연수(1달 동안 사실은 놀러 갔다 온 거지만)도 다녀오고, 철마다 가족여행도 가고, 비싼 외식도 곧잘 하는 그 정도. 가기 싫은 학원도 맘껏 다닐 수 있었던 정도. 그러나 그 시간이 오기 전에 우리는 이미 가난을 경험했었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에 IMF가 터져 여타와 다를 것 없이 나의 아버지도 일자리를 잃으셨다. 당시에는 교회에 헌금 대신 성미라고 쌀을 조금씩 가져다 내곤 했는데 우리는 그 성미를 얻어다 먹곤 했다. 결국은 아버지가 타지로 일자리를 구해 떠나셨다. 아버지가 떠나기 전 날 밤새도록 배갯잎을 적시며 울던 어린 나를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한다. 볶음밥을 해 주시고는 당신들은 배가 부르다며 오빠와 나만 먹이시던 그 날들을 나는 잊지 않았다.


 어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 중 강하게 각인되어 이미지화되어버린 어느 날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어머니의 집은 늘 가난과 함께 했단다. 고기는 언감생심, 어느 날 아버지(그러니까 나의 외할아버지)가 굵고 긴 소시지(옛날 도시락에 나오는 계란에 부쳐 먹는 소시지)를 사 오셨고, 그 소시지를 마치 삼겹살 굽듯이 불판에 구워 하나씩 집어먹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맛이 어찌나 좋던지 여전히 기억이 난다는 어머니.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왠지 쓸쓸했고, 조금 울컥했지만 그럼에도 그 불판 앞에 모여있을 풍족하진 않지만 참으로 단란했던 한 가정의 모습이 떠올라 약간은 쓴 미소가 지어졌다.

 반대로 아버지는 무척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할아버지는 물려받은 땅이 워낙에 많으셨고, 방이 몇십 개나 되는 큰 여관을 운영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팔 남매의 대가족이었고, 부모의 사랑을 느껴보진 못했지만 돈이 부족한 적은 없었다고. 고등학교 때 혼자 고깃집에 가 소고기를 시켜 구워 먹곤 했다고. 그러나 친할아버지는 늘 바깥으로 돌며 집에 잘 들어오지 않으셨고, 혼외자식까지 낳으셨다. 할머니는 그 큰 여관을 혼자 건사하며 일찍이 등이 굽으셨다. 결국엔 장남과 차남을 통해 그 많던 재산을 다 탕진하시고 그 밑으로 줄줄이 있던 여섯의 동생들은 재산의 수혜를 입지 못했다. 아버지의 유복함은 고등학생 때 혼자 소고기를 구워 먹던 그 시간들로 끝이 나고 만 것이다.


 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IMF가 왔던 그 어린 날의 가난은 주말마다 찾아오는 아버지 손에 들린 피자 한판으로 금세 행복해지곤 했다. 오히려 그 시간 동안, 주말밖에 모일 수 없는 가족이기에 주말마다 이곳저곳 멀지 않은 곳으로 나들이를 나가곤 했다. 고등학생 때 찾아온 가난은 피자를 들고 올 아버지는 사라졌지만 마치 전우애로 똘똘 뭉친 전우와도 같은 어머니가 내 곁에 있었다. 우리는 가난의 불편함이나 어려움보다는 밝은 것을 보기 위해 애썼다. 야 우리 계란 살 돈도 없어서 계란 프라이 하나를 못 먹는다 어머니가 말씀하시면 나는 그니까 하며 둘이 같이 낄낄대며 웃곤 했다. 그래도 이렇게 웃는다 하며 한바탕 더 웃고 나면 그래, 이런다고 사람이 죽는 게 아니야 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실제로 나는 그 시간들 동안 단 한순간도 계란을 못 먹어서 불행하다고 여긴 적이 없을뿐더러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이 왜 이렇게 집이 추워 물을 때 우리 집은 돈이 없어서 보일러를 못 떼라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여겨본 적 또한 없다. 오히려 그 시간들을 지나오면서 나는 참 많이 단단해졌고, 무엇보다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그 또한 지나갔기에. 그리고 그 순간에도 나는 웃을 수 있었기에.  

 

 어머니는 가난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못한 것이 가장 서러웠다며, 또래 아이들이 등교하는 그 길목에서 아버지와 함께 라면땅 장사를 나가던 그 시간들은 정말이지 큰 상처이며 수치였다고 말씀하셨으나 그럼에도 어머니는 그 덕분으로 부요할 때에도, 가난할 때에도 늘 담담하셨고, 상황에 맞는 현명한 대처를 하셨다. 그로 인해 나 또한 가난한 중에도 불안하지 않을 수 있었으며 풍족한 중에도 자만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난을 견디기 힘들어하셨다. 나의 가난을 누군가에게 들키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하셨으며, 손에 쥔 것이 있어야만 당당하고 떳떳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었다. 나는 그 부분이 아버지에게 느끼는 가장 큰 안타까움이다. 나는 한순간도 아버지에게 물질을 바라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물질이 있어야만 아비 노릇을 할 수 있다고 여기셔서 속상할 따름이다.


 나에게 다시 한번 가난이 찾아왔다. 이제는 부모님이 아닌 신랑과 맞이하는 가난이다. 가난이 두렵지 않다 생각했으나, 내 앞에 부모님이 계시던 그 시절들의 가난과 달리 가난의 주체가 내가 되고 보니 불안 체감지수가 장난이 아니다. 내가 못 먹고 못 입는 건 참을 수 있겠으나 남줄 돈을 못주게 생긴 것이 가장 큰 불안이다. 대책 없이 떠났던 모험의 여파가 이리도 크게 다가올 줄이야 후회를 하려면 끝도 없겠으나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 웃었다. 같이 살면서도 매일 배달에, 외식에 사 먹기 바빴는데 요 몇 주 동안 태어나 제일 열심히 집밥을 해 먹는다. 습관처럼 먹던 커피를 안 먹어도 죽지 않고 잘 살아있다. 냉장고가 없어도 살고, 세탁기가 없어도 죽지 않는다. 라면만 먹어도 굶지는 않으니 다행이고, 침대가 없으면 바닥에서 자면 그뿐이다. 나는 생각도 걱정도 많아 나중 걱정도 끌어다 오늘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오늘만 살기로 마음먹고 보니 못 살 것도 없다. 아마 세월이 흘러 돌아보면 2016년이 가장 힘든 해로 기억될 것 같아 하고 신랑이 말한다. 나는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하고 답한다. 이게 가장 힘든 시간이라면 그래도 꽤 살 만한 인생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또한 뜻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이 순간들을, 함께 지나온 이 시간을 잊지 않을 것이다. 계란도 못 사 먹던 그 순간도, 시간이 지나면 그래, 계란 안 먹어도 살더라 나의 힘이 되고 무기가 되는 것처럼 이 시간들을 지나며 우리는 앞으로의 시간 중 다시 한번 혹은 여러 번 고비를 마주할 지라도 우리 그때도 죽지 않았잖아 하며 웃을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길고 지루한 글을 다 읽으신 분이라면 너 정말 흙수저네 하시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흙수저가 좋다. 자고로 흙을 화수분이라 하지 않았던가. 금과 은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을 수 있겠으나 흙이라면 무엇이든 뿌리는 대로 거두는 무한의 가치이다.


그러니 흙수저 들이여, 오늘은 웃자!
그리고 금 따위에 기죽지 말자!
우리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나무를 키우는 흙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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