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가능한 기록법
모든 것을 기록하기 실험을 종료하고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기 실험을 진행 중이다. 이 극단적인 두 가지 실험을 통해 몇 가지 깨달음을 얻었기에 이곳에 써 보고자 한다.
나에게 있어 가장 오래, 가장 충실하게 기록한 영역은 돈에 대한 기록이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쯤 엄마는 내게 용돈 기입장 하나를 사 주며 일주일 단위로 용돈을 주기 시작했다. 나는 스스로 납득이 되는 한에서는 엄마 말을 꽤나 잘 듣는 아이였으므로 착실하게 용돈기입장을 써 나가기 시작했다. 중학교에 입학하자 엄마는 나를 데리고 은행에 가서 내 이름으로 된 통장과 체크카드 하나를 만들어 주었다. 내 이름이 적힌 카드를 꺼내 결제를 할 때면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때부터 통장 정리가 일종의 취미가 되었다. 인터넷 뱅킹이 상용화되기 전까지 나는 허구한 날 은행의 CD기 앞으로 달려가 통장을 밀어 넣곤 했다.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기 실험을 진행하며 약 두 달간 가계부조차 쓰지 않고 있지만, 그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지금껏 돈에 대한 기록을 멈춘 적은 없다. 나는 여전히 수기로 가계부를 쓴다.
일기는 조금 다른 문제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일기 쓰기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빈 노트를 제출할 만큼 대범한 성격도 못 돼서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곤 했다. 3일에 한 번 꼴로 동시를 지어낸다거나, 책 속 인물에게 편지 쓰기, 책 속 인물이 되어 보기, 절반 이상을 그림으로 채우기 등 다양한 시도를 하며 페이지를 채웠다. 중학생이 되자 러브장이라든가 다이어리 꾸미기 같은 게 유행했는데, 그동안 기록에 대한 욕구가 없었던 것은 아닌지라 유행의 물결에 슬쩍 올라타 다이어리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고등학교에 올라갈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렇게 쌓인 여러 권의 다이어리들은 내 보물 상자에 고이 모셔져 오래 보관되었는데, 결혼 전 짐을 정리하다 다시 펼쳐 본 다이어리 속에는 부끄럽고 수치스럽기만 한 어린 시절의 조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나는 몹시 불쾌한 기분이 되어 그것들을 전부 찢어 버린 뒤 다시는 다이어리를 쓰지 않게 되었다.
퇴사 후 시간이 남아돌아 이 책 저 책을 닥치는 대로 주워 읽다 만난 <불렛저널>은 내가 다시 기록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감정을 배제한 기록 방법이라는 것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펼쳐도 내게 수치를 주지 않을 기록이라면 시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기록하기 실험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약 2년 간 불렛저널 기록을 지속했고, 나름의 만족감을 느끼면서도, 기록 그 자체에 상당 시간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오늘 무엇을 먹고, 입고, 샀는지, 어디에 갔는지, 무엇을 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그 모든 것을 기록할 필요가 있는가? 잊지 않기 위해 기록을 한다지만 그것은 본성을 거스르는 시도와 비슷하다. 망각의 늪에 빠지지 않고 기억의 왜곡을 방지하기 위해 기록을 한다지만 순간을 온전한 상태로 잡아 둘 방법은 결코 없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기록하지 않아도,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몇몇의 기억들. 사실은 그것들이 진짜 가치 있는 것들이 아닐까?
그렇게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기 실험이 시작되었다. 일단 나는 시간이 굉장히 많아졌고,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기록에 대한 압박에서 자유로워졌으며, 잊히지 않는 기억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흘러간 시간에 미련을 두지 않게 되었고, 현재를 조금 더 편안하고 즐겁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바로, 가치 있는 기록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리를 끝냈다는 것이다. 나는 역시 가계부 쓰기를 포기할 수 없을 테고, 책을 읽으며 밑줄 친 문장들을 따로 기록해 두는 것은 유용한 자료가 되기에 지속할 가치가 있다. 어떤 책들을 사고 또 읽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그때그때의 관심사를 고스란히 보여주기에 매우 쓸모 있는 기록이 된다. 그 외에는 매우 간결한 형태의 스케줄 기록이 지속할 만하다. 또 한 가지 시도해 볼 만한 아이디어는 하루 중 가장 인상적인 사건을 단 한 가지만 골라 기록하는 것이다. 영원히 잊히지 않는 기억들은 아마도 그 사건들 중에서 나올 테니까.
그러니까 나는 계속 기록하는 인간이 되어 볼 생각이다. 현재 진행 중인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기 실험은 더 나은 기록을 위한 잠깐의 웅크림일 뿐이다. 지속 가능한 기록 방법은 결국 내가 스스로 찾아야 한다. 나만의 방법을 찾을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해진다. 그러나 아직은,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기 실험을 멈추고 싶지 않다. 이 여유로움을 조금만 더 만끽한 뒤에, 어느 날 문득, 때가 왔다 싶은 순간이 오면, 다시 성실한 기록자의 삶으로 돌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