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을 허용하라

by 감우

비비언 고닉의 책, <상황과 이야기>를 읽고 있다. '쓰기'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은 오랜만이다. 한동안 의식적으로 그런 것들을 찾아 읽었고, 또 한동안 의식적으로 그런 것들을 멀리했다.


나는 에세이보다는 소설을, 리얼리티보다는 드라마를 선호한다. 허구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인간은 허구라는 방패가 드리워졌을 때 오히려 진짜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다고, '나'를 드러내며 진실을 말하기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아니 에르노의 책들을 연거푸 읽다 생각이 바뀌었다. '나'를 드러내며 '진짜'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을 때, 그 폭발력은 허구의 이야기가 결코 넘볼 수 없는 영역이 된다. 에세이에, 진짜 이야기에 조금씩 관심이 생기기 시작할 무렵, 브런치 스토리에서 나의 이름 아래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라는 딱지를 달아줬다. 나는 그 딱지를 볼 때마다 조금 부끄러워졌다. 내가 <상황과 이야기>를 읽고 있는 이유다.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고 싶다. 언젠가는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하지만 꿈꾸던 모든 것을 가지게 되면 더한 것을 원하는 법이다.

(줌파 라히리, 로마 이야기_99쪽 <밝은 집> 중)

위 문장을 거름 삼아 한편으로 이런 희망을 가져 본다. 지금의 이 결핍이 나를 성장시킬 거라고.


우리는 모두 충족된 무언가를 갈망하지만 사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결핍일지도 모른다. 아니, 정확히는 결핍을 극복하려는 욕망이 중요하다. 창조성이란 결핍을 극복하려는 욕망의 발현이다. 멋진 옷을 입고 싶은 욕망과 멋진 옷을 사기에는 가벼운 지갑이 충돌할 때 비로소 우리는 코디네이션에 골몰하게 된다. 가진 것 안에서 조합에 조합을 거듭하여 최선의 착장을 완성시키는 것. 그것은 백화점에 가서 마네킹이 입은 옷을 그대로 벗겨 사 오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롭고 숭고하다. '나만의 스타일'이 그렇게 완성되는 것이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려는 욕심 어린 욕망이 때론 매우 창조적인 무언가를 탄생시킨다. 그렇게 믿고 싶다.


본격 창업 준비를 시작하며 매일 생각한다. 돈 걱정 없이 원하는 것을 다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산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더 멋진 공간을 완성시킬 수 있을까. 제한된 액수를 들여다보며 울적해질 때마다 결핍이 빚어내는 창조력에 희망을 걸어본다. 현재의 결핍이 오히려 나의 고유성을 밝힐 등불이 되어줄지도 모른다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려는 발악이 나의 공간을 낯설지만 매력적인 영역으로 인도할지도 모른다고.


[쉐임리스]의 마지막 시즌을 보고 있다. 갤러거 가족의 기나긴 여정을 단숨에 따라잡으며, 결핍의 힘에 대해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이들은 아무리 짓밟아도 죽지 않는 잡초 같고,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박멸할 수 없는 바퀴벌레 같다. 그 질긴 생명력은 지나친 결핍의 허용으로 이뤄낸 쾌거다. 시즌 초반에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들을 바라봤다. 이 총명한 아이들이 조금만 더 좋은 부모를 만났더라면 얼마나 더 잘 성장할 수 있었을까. 시즌 후반으로 갈수록 그 생각이 바뀌어간다. 이들이 가진 역량의 최대치를 뽑아낼 수 있었던 것은 사실 결핍 덕분이라고. 대막장 서사극을 완성시키는 갤러거 가족의 온갖 만행은 충격을 금치 못하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살아남을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수도 없이 뛰어넘으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발악적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마지막까지 버티는 자가 이기는 거라고. 그렇다면 이들 막장 가족은 명백한 승자의 포지션을 기어코 차지하고야 말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린 시절 나에게 주어졌던 수많은 결핍들을 생각하며 아이 낳기를 꺼려왔다. 좋은 부모가 될 자신도 없거니와 나에게서 비롯되어 아이가 책임져야 할 여러 결핍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는 나에게 주어졌던 결핍들로 인해 성장했다. 그러니까 언젠가 아이를 낳게 된다 해도 담담하고 유쾌하게 결핍을 허용하는 엄마가 되기로 했다. 남들이 가지는 것은 다 가지고도 하나를 더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아이보다 가장 원하는 것 하나를 얻기 위해 방법을 모색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 보고, 궁리를 거듭하는 아이가 더 단단한 어른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물론 나는 여전히 에세이보다는 소설을, 리얼리티보다는 드라마를 선호하고, 여전히 나의 글에 자신이 없고, 여전히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나에게는 여전히 (내가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결핍이 필요 이상으로 허용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결핍에 감사해 보려 한다. 그렇다고 결핍을 결핍으로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는 말은 아니다. 지금부터 결핍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역량껏 모색해 볼 생각이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단단한 어른이 되어 있길 기대하면서.

이것은 로고 아이디어라 쓰고 낙서라고 읽는, 대충 그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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