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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우 Mar 28. 2017

이름도 예쁜 연희, 네가 참 좋다.

2017년 3월 28일

1. 우리가 연희동에 새 집을 구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이름이 예뻐서였다.

그는 거의 입사와 동시에 강변에 쭉 살았고,

나는 그와 함께 살기 시작하며 강변 주민이 됐었는데

새로운 시작을 하기로 한 만큼 터전도 바꿔보자는 의미에서

서울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우리가 집을 구할 때 기준으로 둔 것은

동네가 예쁠 것, 동네에 예쁜 곳이 많을 것, 교통이 너무 불편하지는 않을 것,

그리고 동네의 이름이 예쁠 것.

우리의 보기로 떠 오른 동네는 서촌, 혜화, 홍대였는데

서촌은 집 값이 비싸서 그중 우리가 들어갈 수 있으면서도 너무 좁지 않을 곳을 찾다 보니

부동산 사장님은 을씨년스러운 단독주택을 소개시켜줬다.

복층에 단독주택이었고, 월세는 쌌고, 꽤나 흥미롭고 독특한 구조의 집이었는데

방이 무려 세 개 혹은 네 개가 있었던 것 같다. 화장실이 두 개였고 이층 작은방은

다락방 같은 느낌으로 조그만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는 일이 즐거울 것 같은 집이었다.

너무 낡고 벽은 다 뜯어져 일본 공포영화에나 나올법한 비주얼이었지만

공을 들여 꾸며놓으면 또 세상 어디에도 없는 아지트가 될 것만 같아 나름대로 매력 있는 집이었는데,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 집을 택하지는 않았다.

혜화는 우리 부부의 친한 친구가 살고 있어 매력적이고 이름도 예뻐 좋았지만

교통이 불편해 탈락됐고, 결국엔 마지막 보기였던 홍대의 이름도 예쁜 연희동에 안착하게 되었다.


2. 지낼수록 마음에 쏙 드는 연희동은 이름만큼이나 동네도 아기자기 예쁘다.

출퇴근을 걸어서 하는데 어제부터는 퇴근길을 조금 돌아온다.

집으로 오는 길에 경의선 숲길을 따라 조금 걷고,

돌아오는 길엔 골목골목을 관광객처럼 두리번대며 오는 것이 나의 일정인데

사실 연희동 주민이 된 지 사 개월이 다 되도록 경의선 숲길을 끝까지 걸어보는 것이 어제가 처음이었다.

나에겐 미지의 길이었던 한적한 산책길은 끝까지 가 보니 생각보다 금세 끝나 아쉬운 길이었지만

그와 함께 커피 한 잔씩 사 들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산책하기 딱 좋은 거리이기도 했다.

그 길을 걷다 보면 뻥 뚫린 한강이 나올 줄 굳게 믿었던 나로서는 적잖이 실망하기는 했지만

퇴근길 나 홀로 산책길을 거닐며 만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이 생각보다 재미있다.

오늘은  도도한 검은색 뿔테 안경에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여자가

김밥을 야무지게 꼭꼭 씹어먹는 장면을 목격했고,

내가 그 앞을 지나치든 말든 상관없이 벤치에 앉아 손을 맞잡고 키스하는 커플을 만났으며

세월에 지쳐 조금은 늘어져 있는 얼굴을 하고 그럼에도 팔짱을 끼고 걷는 노부부와 마주쳤다.

자기 키만 한 전동 킥보드를 타는 어린 남자아이를 만나 그의 킥보드가 조금 부러웠고,

여자 세명을 카메라가 우르르 둘러싸고 서서 영문 모를 뭔가를 촬영하는 무리도 만났다.

유심히 보았지만 내가 아는 얼굴은 없었다.

쭉 걸어 개천을 따라 한강까지 도달해보고 싶었지만 한강으로 가는 길의 굴다리가 너무 어두워,

더 어두워질 돌아오는 길이 진작부터 겁이나 굴다리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대신에 어제는 시도해보지 않았던 골목으로 정말이지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걸어갔다.

어제는 길을 잃을까 두려워 시도하지 못했던 길이 오늘은 조금 용기가 났나 보다.

자꾸만 걷다가 어디에 있을지 궁금했던 인생 술집을 만나 너무나 반가웠고

오래된 가게들 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문학적 이름을 가진 작은 카페가 있는 골목을 지나

세계 음식들이 다 모여있는 것만 같은 예쁘거나 소박하거나 커다란 식당들을 만났다.

한여름 햇살 밝은 날, 야외에 좌석이 있는 가게에 앉아 맥주 한 잔 마시는 일을 좋아하는 나는

올해 들어 처음으로, 여름이 조금 기다려졌다.

내가 다시 이 골목을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분명 자신 없는데,

그럼에도 걷기 싫어하는 남편을 끌고 함께 헤매더라도 꼭 다시 이 골목을 찾아와야겠다고 결심했다.

예쁜 것을 좋아하는 남편은 걷는 내내 투덜대며 따라오겠지만

골목에 도착하는 순간 나보다 더 기뻐할 것이 분명하므로.

아무것도 아닌 허름한 길도 어느 곳 하나 아무것도 아닌 곳이 없어서 역시 연희가 좋다.

다행히도 내 발걸음이 나를 무리 없이 집까지 데려다주었는데

매일 지나치던 길에 보이던 베이비 스튜디오 옆에 노인 장기요양센터가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왠지 씁쓸하고 한 편 서글픈 그 조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희동의 모습 같아 좋았다.

여기서 오래 살고 싶다.

이름도 예쁜 연희, 네가 정말 정말 좋다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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