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운명
줄곧 시를 썼다던 그는 더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순수문학을 하고 싶다던 그녀는 의상 디자인을 전공했다.
동화작가를 꿈꿨다는 그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아이를 빨리 갖고 싶다던 그녀는 아이를 가질까 봐 겁을 낸다.
아이를 낳기 싫어하는 그는 아이의 옷을 디자인하고,
패션 근처로는 가지도 않겠다던 그녀는 매일 옷을 보며 글을 쓴다.
물욕이 없다던 그녀는 매일같이 부자가 되기를 꿈꾸고
부자가 되고 싶다던 그는 돈보다는 꿈이 중요한 사람이다.
한 달에 한 번씩 그녀에게 전화를 걸던 그는 그녀에게 전혀 마음이 없었다고 말했고,
단 한 번도 그에게 먼저 연락을 한 적이 없던 그녀는 그와 네 번째 만나던 날 연인이 되었다.
깔끔한 걸 좋아하는 그는 세상에서 청소를 가장 싫어하는 여자와 결혼했고,
결단력 있는 남자가 이상형이라 말하던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우유부단한 남자와 결혼했다.
결단력이 넘친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그에게서 결단력을 좀 키우라는 말을 태어나 처음 들었고,
착하고 순진하다고 생각했던 그는 그녀에게서 이기적이고 야비하다는 말을 태어나 처음 들었다.
단 한 번도 귀여워본 적이 없던 그녀는 그를 만난 후 매일 귀여움을 받았고,
단 한 번도 남 앞에서 울어본 적 없는 그는 그녀를 만난 후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피자를 좋아하지 않던 그녀는 그를 만나 피자가 좋아졌고,
커피를 못 마시던 그는 그녀를 만나 커피 중독자가 되었다.
생크림을 먹지 못하던 그녀는 그를 만나 생크림의 달콤함을 알게 되었고
된장찌개에 우렁만 들어가는 줄 알았던 그는 그녀를 만나 고기가 들어간 된장찌개의 고소함을 알게 되었다.
자수를 취미로 삼고 싶어 하는 남자와
암벽등반을 취미로 삼고 싶어 하는 여자가 한 집에 산다.
분노를 분출할 줄만 아는 여자와
분노를 참을 줄만 아는 남자는 부부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책을 읽지 않으면서도 그녀의 글을 가장 먼저 읽기를 소원하고,
우유부단한 자신이 고단할 때, 결단력 있는 그녀가 있어 든든하며,
청소를 싫어하는 그녀 대신에 청소하는 일을 억울해하지 않는다.
또한 그녀는,
순수문학을 갈망했지만 의상디자인을 전공한 덕에 그의 일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결단력 있는 남자를 원했지만 우유부단한 그를 만나 조금 돌아가는 길의 여유로움을 경험했으며,
분노를 참을 줄만 아는 그를 만나 분노를 분출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렇게 남자와 여자는
조금씩 닮아가고,
조금씩 닳아간다.
너무도 달라 이해할 수 있고,
너무도 닮아 공감할 수 있다.
그녀는 그를 만나기 전과 후로 인생이 나뉘고,
그는 그녀를 만나기 전과 후로 가치관이 바뀌었다.
'우린 너무 안 맞아' 매일 서로를 향해 토로하는 남자와 여자는
어쩌다 부부가 되었고,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