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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우 May 27. 2019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이해와 공감의 차이

#1

요즘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늘 확신에 차서 나는 이런 사람이야 말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내가 어떤 사람인지 혼란스러워졌다.

확신이 한 번 흔들리고 나니 걷잡을 수 없어졌다.

이럴 땐 글을 쓰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2

나는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말하는 만큼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을 어려워해 본 적이 없다.

그게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건 내가 사교성이 좋아서라기 보다는, 대화의 기술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화의 기술이란 별 게 없다. 일단 시작은 질문으로 하는 편이 좋다.

그리고 상대방이 어떤 답을 하든지 그에 대한 판단이나 비평을 하지 않으면 된다.

리듬을 타듯 자연스럽게 추임새를 넣고, 한 번씩 공감의 몸짓을 연출해 주고

타이밍에 맞춰 나의 비슷한 경험을 하나 꺼내 이야기한다.

그러면 상대방은 어느새 호의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밀한 속내를 꺼내 보이곤 한다.

나에겐 너무 쉬운 일이었다.

상대방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게 하는 편이 더 쉬우니까,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종종 오해를 하곤 한다.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하거나, 나와 엄청 친해졌다고 생각하거나, 기타 등등.

사실 따지고 보면 세상에 이해 못할 일이라는 게 있을까?

바람을 피거나, 사기를 치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사람을 죽이는 일조차 들여다보면 이유 없고 사연 없는 결과는 없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이유가 없을지라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의 트라우마나 유년시절의 경험, 부모의 성향에서 대부분의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나는 타인의 성향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이유를 찾아내는 일을 마치 취미처럼 즐기곤 했다.

상황별 심리 패턴이나, 유형별 대처법 등 인간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는 게 즐거웠다.

그렇다고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었냐 하면 그건 아니고, 진짜 얘기를 듣다 보면 이해가 되거든.

열에 아홉은 이 기술에 무조건 넘어온다.

그럼 나는 속으로 "오케이 계획대로 되고 있어"를 외치는 것이다.

그렇게 대화의 기술을 마스터했다고 생각할 때쯤, 문제가 생겼다.

말하기를 그렇게 좋아했던 내가, 요새는 내 말에 자꾸 걸려 넘어지는 느낌이다.

내가 뱉어낸 말에 나 스스로 말려서 허우적거리기 일쑤다.

뭔가 문제가 생긴 게 확실하다.


#3

그렇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다 나름의 결론을 도출했다.

내가 이제껏 이해와 공감을 혼돈하고 있었다는 것.

이해란 '그럴 수도 있지'의 마음이고

공감이란 '나도 그래' 혹은 '나도 그럴 것 같아'의 마음인데

그 둘을 혼돈해서 사용하고 있었다는 게 나의 실수였다.

얼마 전 누군가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남들에게 보여지고 싶은 내 모습이 있는 거 아니냐고.

그때는 잘 정리가 안 되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답했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아마 말 잘 통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뭐든지 말할 수 있는 사람, 뭐든지 말해도 되는 사람, 뭐든지 이해해 주는 사람.

좀 더 폭넓은 데이터를 수집하려면 그렇게 되는 쪽이 편하기도 했고

사실 저렇게 되면 좋은 사람 이미지는 자동으로 따라오거든.

여기서 문제는, 좀 더 깊은 곳의 이야기를 꺼내게 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때론 의도적으로

이해를 넘어 공감하고 있다는 제스처를 취했다는 것.

거기서부터 내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 같다.

이해는 해도 공감은 하지 못했는데, 자꾸 공감하는 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과정 자체에 약간의 피곤함과 스트레스를 느낀다.

타인에 대해 밀도 높은 탐구를 하는 일이 더이상 즐겁지 않다.

타인에 대해 너무 많은 정보를 알게되는 게 부담스럽다.

여전히 누군가를 만나면 자동 반사처럼 분석하려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고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대화의 기술을 쓰려 하지만

이제 더이상, 머릿속에서 합을 맞추고 계산하며 누군가를 대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로, 날 것의 나로, 타인을 대하고 싶다.

남이 아닌 나를 탐구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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