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4. 일
내 남편은 감도 호소인이다. 같은 학교에서 같이 공부한 주제에, 지가 디자이너면 디자이너인 거지 말이야, 허구한 날 나를 보며 "넌 감도가 좀 떨어지잖아." 하거나, "가게 꾸밀 때는 항상 나한테 컨펌을 받으라니까!" 한다. 우리 가게 손님들은 다 가게가 너무 특별하고 예쁘다 하고, 사장님이 감각이 좋다고 칭찬을 해 주시는데, 내 남편만 그걸 모른다. 오죽하면 아랫집 사장님은 "감도 합격인가요?"라는 말을 유행어처럼 쓰는 중이다. 어제는 플로팅 인스타그램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가볍게 담아 보았는데, 그러다 문득 '감도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떤 단어에 새삼스러운 의문이 제기되면 일단 사전을 찾아보는 것이 순서다.
감도(感度)
: 외부의 자극이나 작용에 대하여 반응하는 정도
솔직히 이제까지는 남편이 감도 타령을 할 때마다 '너나 잘하세요.' 하며 은근히 무시했었는데, 사전적 정의를 찾아본 뒤로 어쩐지 내가 감도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확실히 외부의 자극이나 작용에 빠르게 반응하는 타입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건 나의 결핍에서 기인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릴 적부터 유행에 민감한 편이 아니었는데, 그건 내가 터득한 일종의 생존법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가정환경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라는 표현을 쓸 정도는 아니었지만, 빠르게 변하는 유행을 모두 쫓아다닐 만큼의 여유는 있을 리 만무했다. 부모님에게도 자존심을 세우기 일쑤인 모난 성격 탓에 뭘 사달라느니 하는 아쉬운 소리를 못했던 탓도 있지만, 아무튼 결과적으로는 내 또래 대부분의 아이들이 가졌던 것들, 시기마다 대대적으로 유행했던 물건들을 가져 보지 못한 채 그 시절을 지나왔다. 일테면 휠리스, 킥보드가 그것이고, 등골 브레이커라며 아홉 시 뉴스에까지 등장했던 노스페이스 패딩도 가져 본 적 없다. 어쩌면 다행히도, 당시의 나는 그것들이 갖고 싶어 안달을 내지도 않았거니와, 딱히 결핍이라 여기지도 않았던 것 같다. "남들 다 가지는 거 난 필요 없어."라는 말은 돌이켜 생각하면 지독한 방어기제의 발현이었겠지만, 말과 마음이 다르지 않았으므로, 나는 저 문장을 때때마다 주문처럼 읊조리며 모든 유행을 홀연히 통과했던 것이다.
내 아버지는 구질구질한 모든 것을 경멸했다. "남들에게 선물할 일이 있을 때는 최고로 좋은 것을 주어야 한다. 너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야. 지금 당장 좋은 것을 가질 수 없다고 차악을 고르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란다. 그 돈을 아끼고 모아 다음번에 더 좋은 것을 살 생각을 해야지." 아버지는 이런 가르침을 내게 주었다. 아버지는 진짜로 본인이 말한 대로 살았다. 우리 집에는 항상 500원 돼지 한 마리와 100원 돼지 한 마리가 장롱 속에 들어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렇게 열심히 모은 돼지 두 마리를 헐어 아내에게 몇 백만 원짜리 모피 코트를 사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자꾸 어디서 옷을 얻어다 입는 어머니가 곱게 보였을 리 없다. 두 사람은 말 그대로 태생부터가 다른 종자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러거나 말거나 꿋꿋이 옷을 얻어다가 창의력을 발휘하여 세상에 하나뿐인 옷을 만들어내곤 했다. 셔츠 칼라에 진주를 달고, 없던 주머니를 만들어 넣고, 살짝 해진 부분에 알록달록한 자수를 새겨 넣거나, 사이즈가 맞지 않는 옷에 셔링을 잡아 맞춤옷을 만들어냈다. 어머니의 마법 같은 손길이 닿은 옷들을 입고 나갈 때면 꽤나 부러움을 사기도 했는데, 어머니는 그럴 때마다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이건 돈 주고도 못 사는 거야." 하고 너스레를 떨곤 했다. "남들 다 갖는 거에 욕심 낼 필요 없어. 이렇게 적은 돈으로도 세상에 하나뿐인 훌륭한 것을 가질 수 있는걸?" 이건 어머니의 가르침이다.
나는 아버지를 닮아 구질구질한 모든 것을 경멸하지만, 남들 다 가지는 것 말고 나만의 것을 가지는 일종의 꼼수는 어머니에게서 전수받았다. 내가 가지고 싶은 대부분의 것들을 큰 고민 없이 가질 수 있었다면 나도 감도가 개발되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외부의 자극이나 작용에 의식적으로 둔감하려 평생에 걸쳐 노력하다 보니 감도가 높아질 턱이 있나.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나는 비록 감도가 조금 떨어진 인간일 수는 있겠으나, 바로 그 점이 세상에 하나뿐인 훌륭한 것을 만들어내게 도와줄 거라고. 나는 아버지의 딸이기도 하니 구질구질하지 않은 것은 덤으로 가져가기로 하자.
더 이상 세상에 없는 무언가를 추구하지 않기로 했다. 나의 감도 없음이 플로팅을 세상에서 하나뿐인 가게로 만들어 줄 테니까. 내가 감도 떨어지는 인간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없던 자신감도 샘솟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감도 호소인 보아라. 결국엔 내가 다 이긴다니까!
출근하자마자 칠판을 새로 그렸고, 장사는 어제보다 잘 됐습니다. 요즘 책이 많이 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