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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2025.04.04. 금

by 감우

오늘은 오랜만에 조금 일찍 일어나서 점심 도시락(샌드위치)까지 쌌는데 그걸 딱 놓고 나옴 ^^ 정신머리...


그래서 비록 쫄쫄 굶긴 했지만, 그래도 힘을 내어 미루고 미루던 마당 재정비를 드디어... 클리어했다. 겨우내 눈비와 찬 바람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마당에 방치되었던 식물들의 과감한 가지치기와 함께 입혀둔 겨울옷(벼껍데기)도 벗겨 주고, 거름도 뿌려 주고, 영양제도 꽂아 주고, 물도 듬뿍 주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아이들도 몇몇 있으나 일단 기다려 보기로 한다.


오랜만에 바깥에서 흙을 만지고 있으니 저절로 황무지의 구절들이 떠올랐다. TS. 엘리엇의 <황무지>는 이제와 고백하자면 일종의 지적 허영을 가지고 집어온 책이었다. 무직의 시절이었다. 가진 것은 시간뿐이었던 그 시절에, 매일 소리 내어 엘리엇의 시를 한 편씩 읽었더랬다. 도통 뭔 소리인지도 모르겠고, 시라기엔 너무나 길고 지난한 문장들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아무튼 끝까지 읽기는 했다. 그 후로 몇 권의 시집을 같은 방식으로 좀 더 읽었지만, 시를 마음으로 느끼고 음미하는 법은 여전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처럼 시에 무지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바로 그 구절, 그 구절은 어쩐지 한 번씩 떠올라 곱씹게 된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휘젓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곱씹을수록 맞는 말이다 싶다. 언 땅이 녹고,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새순들이 어느새 삐죽거리며 세상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비슷한 것인지 이상하게 봄은 따스한 바람에 설레는 것만큼이나 잡념이 많아지는 계절인 것 같다. 다 같이 웅크렸던 몸이 저마다 각각의 형태로 기지개를 켜며 새삼스레 질투가 피어오르는 계절이 봄 아닐까. '나만 남자친구 없어.' '나만 꽃놀이 못 가.' '나 빼고 다 결혼해.' 등등의 푸념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결국 봄 아닌가.


봄의 시작을 알리는 4월은 그러니까 어쩌면 가장 잔인할 수도 있겠다. 이 뒤로도 많은 문장들이 이어지지만 보통 내가 떠올리는 것은 딱 여기까지인데, 이중에서도 나는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는 대목이 가장 좋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한번 비틀어 보았을 때, 미처 알지 못했던 진실이 숨어 있는 경우가 더러 있다. 황무지의 경우도 내게는 비슷하다.


4월이 잔인하기 때문일까, 겨우내 판매 부진을 겪으며 판매 종료까지 생각했던 걱정 인형이 갑자기 많이 판매되고 있다. 4월의 첫 발주 품목이 걱정 인형이었던 것도 시사하는 바가 없지는 않으리라. 이 작은 가게 안에서도 계절의 변화는 이렇게나 적나라한 흔적을 남기며, 답지도 않게 엘리엇을 운운하게 만들고야 마는 것이다. 불특정 다수를 매일같이 만나는 일은 역시나 재미있는 일이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데이터들을, 챗GPT는 알려줄 수 없는 살아 숨 쉬는 이야기들을, 아무런 노력 없이도 손님들에게 무상으로 제공받을 수 있는 것은, 손님을 직접 만나는 판매직의 특권이라 할 수 있다.

IMG_5095(1).JPEG 정말이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이 작은 땅에서도 기어이 무언가를 키워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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