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 많은 통제광이 사장이 되면...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딱 하나만 꼽아보기로 하자.

by 감우

첫 사업을 시작하는 초보자의 길 위에 힘들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었겠느냐만은, 내가 플로팅 때문에 눈물을 쏟은 적은 단 한 번뿐이니 그날을 가장 힘들었던 날로 정하기로 한다. 때는 인테리어 공사가 한창이던 1월 말, 그 시기의 나는 다소 겁에 질려 있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와중에 숨만 쉬어도 나가야 하는 월세를 가만히 앉아 까먹고 있었으니 말해 뭐 할까. 이 공간을 계약한 것은 2023년 12월 중순 경, 리모델링 후 첫 입주였던지라 약 2주의 렌트프리를 받아 12월은 월세를 내지 않았다. 그 2주 동안 준비를 바짝 끝내 새해 정초부터 영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만은, 정말이지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야 말로, 아무리 거듭 얘기해도 부족한 법이다.


당시의 나는 어느 정도 여유 자금을 쥐고 있었으므로, 공간을 다 뜯어고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인테리어는 할 작정이었다. 일테면 가구라도 조금 짜 넣는다든지. 인테리어에 배정한 나의 예산은 천만 원이었다. 천만 원이라는 돈은 많다면 한없이 많고, 적다면 한없이 적은 돈이다. 인테리어라는 단어 앞에서의 천만 원은 작고도 적었다. 인테리어 업체 몇 곳과 컨택을 했지만, 그 돈으로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뿐이었다. 그러나 예산의 부족이 스트레스가 되지는 않았다. (내가 운용할 수 있는 예산 안에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부족한 부분은 운영을 하며 차차 보완해 나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 차라리 그때는 이 결핍을 보완하려 애쓰다 보면 아주 새롭고 재미난 것이 탄생할 수도 있을 거라는 설렘과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적어도 1월 안에는 정비를 마치고 영업을 시작하겠다고 다짐하며, 움켜쥔 주먹을 매일 밤 남편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이는 것이 나의 루틴이 될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존재조차 자세히 알지 못했던 남편의 사촌 누님이 사실은 인테리어 전문가였다는 새로운 소식과 함께, 이 작은 공간에 대한 통제권이 내 손을 떠나 어느 먼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나는 당연히 인테리어 쪽으로는 문외한이었고, 그러니까 내심 다행스럽다는 마음 반, 아니 아니 이게 아닌데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 반이 공존하며 불안도가 수직 상승하였다. 그러나 나의 걱정과 불안의 정도와는 상관없이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전기 기사님한테 연락하라는 메시지를 받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잘 모르면서 일단 연락을 했다. 이걸 사라면 이걸 사고, 저걸 사라면 저걸 사고, 이걸 보내라면 이걸 보내고, 저걸 보내라면 저걸 보내면서, 매일 바쁘게 돌아치면서도 내가 정확히 어떤 단계의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본격적인 목작업은 1월 말경에나 시작되었고, 나는 공사가 끝나는 날까지도 공사비를 얼마나 지불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먹먹한 불안과 막막한 두려움이 날로 심화되다 결국 울분으로 터져 나온 날이 있었다. 거의 통곡에 가까운 울음을 한참이나 쏟아내야 했던 밤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플로팅은 제법 완성도 높은 공간이 되었다. 돈깨나 쓴 듯한 정돈됨이, 동일한 목재로 통일감 있게 꾸려진 가구와 진열대들이, 상품의 가치도 한결 높여주는 듯하다.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러프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어느 정도 아티스틱한 분위기의 공간은 아니지만, 솔직히 그 또한 내 생각대로 됐을 리 없고, 공간이 예쁘다는 칭찬을 그렇게나 많이 들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전부 인테리어 덕이라는 사실 만큼은 반박할 수 없는 진실이다. 나의 모든 계획은 틀어졌고, 두 달의 월세를 한 푼도 벌지 못하는 상태에서 날로 갖다 바쳤으며, 인테리어 예산 또한 오버되었지만, 어찌어찌 오늘날까지 별 탈 없이 오게 되었으니 인테리어 과정에서 발생한 리스크 일체는 전부 감당할 만한 수준이었다는 결론이다.


다만 한 가지, 폭풍 같던 인테리어 기간과 한 차례의 거센 통곡을 쏟아내며 다시금 깨달은 사실이 있다.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돈을 까먹는 것도, 망하는 것도, 매출이 나오지 않는 것도, 계획이 틀어지는 것도 아닌, 통제권을 상실하는 것이었다. 엄마가 지금까지도 종종 하는 이야기가 있다. "너는 바빠 죽겠는데 얼른 신발 신겨 나가려고 손만 갖다 대도 난리 재랄을 쳤어. 억지로 신기면 어떻게든 다시 벗어던지고 직접 다시 신어야만 직성이 풀렸지. 신발을 거꾸로 신고 있어도 그대로 데리고 나가야 돼. 너는 정말 감당이 안 됐거든. 분명 불편할 텐데 다시 신겨 주는 것도 안 된대. 신발을 거꾸로 신고 하루 종일 그러고 다녀. 울지도 않어. 그거 보고 나는 니가 진짜 크게 될 줄 알았다."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하도 들어 마치 내가 직접 목격이라도 한 것 같은, 엄마와 나 사이의 자조적인 에피소드 중 하나다.


나는 아마도, 지독한 통제욕을 타고 나온 모양이다. 그게 문제가 되어 친구 관계가 어긋나거나 사랑에 실패한 적이 수차례다. 지독하게도 통제가 되지 않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 통제라고는 조금도 허용되지 않는 조직 생활이란 것을 하면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세상을 향해 통제 항복 선언을 했으나, 타인에 대한 통제 의지를 상실하면 상실할수록, 나 자신에 대한 통제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다. 역시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가 보다. 나는 지금도 엄마가 신겨 준 신발을 벗어던지며 울고불던 어린아이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거꾸로 신더라도 내가 '직접' 신어야 한다. 결과보다는 '직접'했다는 사실이 나의 효능감을 충족시키며, 그래서 여전히 타인이 건네는 도움의 손길에 어느 정도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나 자신에 대해서 만큼은 완전한 통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 안정감을 느낀다. 내 감정도, 내 성취도, 내 실패도, 내 좌절도, 내가 통제할 수만 있다면 감당할 수 있다. 그 때문인지 결과에 대해서는 망하든 흥하든 상관없이 의외로 덤덤하다.


플로팅은 내 것이고, 또 다른 나와 다름 아니다. 언제까지고 이런 마음으로 운영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혼자 일하는 기간 동안만큼은 그게 맞고, 그래야만 한다. 인테리어 이후로 나는 플로팅에 대한 통제권을 있는 힘껏 움켜쥐고서 누구에게도, 조금도, 내어주지 않았다. 내가 다시는 울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다. 플로팅과 관련된 모든 결정은 내 손 끝에서 완성되어야 하며, 그 모든 결정의 책임도 온전히 내가 질 수 있어야 한다. 그 책임이 내가 망하는 것이라면 나는 기꺼이 망할 준비가 되어 있다. 결정과 책임이 모두 내 것이 될 수만 있다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울며 주저앉지는 않는다. 이 글을 쓰다 보니 통제욕의 다른 말이 욕심인가도 싶다. 흥도 망도 누구와 나눠갖고 싶지 않은 이 지독하고 독단적인 욕심도 날 때부터 타고 나왔을까? 나의 이 집착적인 통제욕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이왕이면 엄마 말대로 크게 되면 좋을 텐데. 좀 더 지켜볼 일이다.

그래도 아무튼 인테리어는 하고 볼 일이다 싶은 비포 애프터의 극적인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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