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생애 첫 사업, 생애 첫 장사, 생애 첫 (사회적) 독립. 플로팅의 모든 순간이 내게는 전부 처음이었다. 플로팅에 전부를 걸었으므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전부 끌어다 써야만 했고, 그렇게 한 고비를 넘을 때마다 부모님 생각이 났다. 내가 받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내가 가진 것이 얼마나 많은지, 플로팅을 하기 전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부모가 돼서 이럴 때 좀 도와주고 해야 되는데, 미안하다."
내가 플로팅의 시작을 알렸을 때, 이혼한 지 한참인 부모님은 오랜만에 한 마음이 되었다. 나는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한 후부터 부모님께 금전적인 지원을 바라본 적 없다. 물론 삶의 순간순간, 경제적으로 해결 가능한 고비가 찾아올 때마다, 내게도 부자 부모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은 셀 수 없지만, 내게는 부자 부모가 없었으니 좌우지간 내 두 발로 모든 고비를 넘어야 했고, 그렇게 했다.
미리 말하자면 나의 성장 환경은 그다지 궁핍하지 않았다. IMF이후 몇 년간 아빠는 타지로 돈 벌러 가고 방 두 칸짜리 집에서 교회 성미를 얻어다 먹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고, 성실한 부모의 성실한 노동을 기반 삼아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즈음엔 60평 아파트 입주에 성공했다. 나는 다니고 싶은 학원에 모두 다녔고, 다니기 싫은 학원까지 다녀야만 했다. 다만 그사이 여러 일들을 겪으며 나의 부모님은 가졌던 것의 전부를 잃었다. 지난한 시간의 연속이었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그 모든 시간들이 내가 받은 유산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렇게 나는 궁핍함과 부유함을 모두 경험해 본 뒤 다시 궁핍해졌다. 바로 이게 내가 받은 첫 번째 유산이다. 가난과 풍요를 모두 경험해 보았다는 것이 엄청난 재산이라는 사실을,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엄마는 돈이 없어서 학교를 못 다닌 것이 평생의 한인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더더욱 책을 가까이 두고 살며, 항상 내게 뭔가를 가르쳐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물고기를 잡아 주는 건 기대하지 마. 대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줄 거야. 잘 보고 배우도록 해." 이건 엄마의 교육 지론이었는데,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본인의 철학을 지키며 살았다. 엄마는 넘어져 있는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법이 없었다. 옆에 가만히 서서 "스스로 일어서. 너 일어설 수 있어." 하는 식이다. 나는 때때로 서러웠고, 엄마가 밉기도 했지만, 그래도 결국엔 스스로 일어나 걸었다. 그래봤자 돌아오는 말은 "거봐, 할 수 있지?" 하는, 딱히 칭찬이라기도 애매한 심심한 말이 전부였지만, 그 순간 나는 어쩐지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게 바로 내가 받은 두 번째 유산이다. 다소 냉철한 엄마를 둔 덕에 오은영 박사가 그렇게도 부르짖는 '자기 효능감'이란 것을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수시로 채우며 살았다. 엄마가 인내심을 가지고 나를 기다려 준 덕분에, 그 성취를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아빠는 60칸짜리 방을 보유한 여관집 막내아들이었다. 내가 세상에 나왔을 때는 이미 가세가 한참 기울어있었지만, 아무튼 할아버지가 큰 부자였다고 했다. 엄마가 남의 집 식모 살이를 하고 있던 시간에, 아빠는 혼자 고깃집에 가서 배 터지게 고기를 구워 먹었다고 했다. 아빠는 우리 가족이 가난을 통과해야 했던 시절에도 부유했던 시절의 감각을 절대 잊는 법이 없었다. "하나를 사더라도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를 먹더라도 가장 맛있는 것으로, 남에게 선물할 때는 더 좋은 것으로."가 아빠의 인생 모토였다. 안 사면 안 샀지, 안 먹으면 안 먹었지, 안 주면 안 줬지, 절대 하급품을 취급하는 법이 없는 아빠가 가끔은 답답하면서도 꽤 멋졌다. 이게 바로 내가 받은 세 번째 유산이다. 가격보다는 품질에 우선순위를 두는 결정들이 쌓이다 보면 그 사람의 선택에 힘이 실리고 신뢰하게 된다는 것을 아빠를 통해 배웠다. 남에게 주는 것은 내가 가지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골라야 한다는 것도, 남에게 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 법도, 모두 아빠에게 배운 것들이다. 아빠는 요즘도 가끔 과일 같은 것을 보내 주는데, 아빠가 보내주는 과일들은 언제나 크고 달다.
엄마는 평생의 한을 풀기 위해 40이 넘어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했다. 초등학교 검정고시부터 시작했던 엄마는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대학원까지 갔고, 최종 학력 석사가 되었다. 엄마는 우리 집에서 가방끈이 가장 긴 사람이기도 하다. 엄마의 도전과 성취를 곁에서 지켜보고 함께할 수 있었다는 것이 내가 받은 네 번째 유산이다. 나는 엄마를 보며 나이는 정말이지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과, 모든 도전은 아름답다는 것, 의지만 있다면 무엇이든, 언제라도, 반드시 이뤄낼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제대로 된 졸업장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평생의 콤플렉스였던 엄마는 본인의 힘으로 그 콤플렉스를 멋지게 극복했으며, 엄마의 (무모하다 생각했던) 도전은 내게도 대표적인 자랑거리이자 자신감의 일부로 전이되었다. 나는 지금도, 늦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큰 도전 앞에서 겁이 날 때마다, 엄마의 도전을 떠올린다. 그럼 언제나 반드시 힘을 낼 수 있게 된다.
부자로의 회귀 본능이 누구보다 강렬했던 아빠는 그 강렬한 욕망을 누구보다 성실한 노동과 누구보다 착실한 저축 습관으로 승화시켰다. 분당 사교육 전성기의 중심에 있었고, 본인의 회사를 운영하며 나름 사회적 성공까지 이루었다가 모든 것을 잃게 된 아빠는 좌절하고 한탄하는 대신 버스 기사가 되기를 선택했다. 주말도 없이, 명절도 없이, 열심히 일하던 아빠는 어느 날 팀장이 되었다고 하더니, 어느 날 아파트를 샀다고 했다. 아빠는 돈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고, 불필요한 사치를 하지 않았고, 작은 돈도 절대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티끌 모아 태산을 언제나 이루어내던 사람이었다. 이게 바로 내가 받은 다섯 번째 유산이다. 만약 나에게 성실함과 끈기라는 재능이 있다면, 만약 나에게 돈을 아끼고 모으는 재주가 있다면, 그건 전부 아빠에게 받은 것이다.
나의 엄마와 아빠는 성장 환경만큼이나 삶을 대하는 방식도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었다. 엄마는 현재 처한 상황과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는 법을 알았고, 결핍 안에서 행복을 찾는 데 능숙한 사람이었다. 아빠는 현재 처한 상황과 현재 가진 것에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었고, 오늘을 희생해서라도 내일의 성취를 거머쥐는 사람이었다. 이게 내가 가진 가장 큰 유산이다.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이 완전히 다른 두 사람에게 두 가지 방법을 모두 배웠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본인들의 철학을 삶으로 치환하는 과정을 내게 삶으로써 보여주었다는 것. 그리고 나를 정말, 잡아준 물고기를 받아먹는 사람이 아니라 물고기를 직접 잡을 줄 아는 사람으로 키워 주었다는 것. 그러니까 그들은 내게 줄 수 있는 것을 이미 넘치게 주었다. 온 삶을 다 바쳐 고스란히 내게 주었다.
길지 않은 삶이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했다. 때때로 부모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성취와 함께 오르고, 그들의 좌절과 함께 떨어지던 그 시간이 내게 얼마나 많은 것들을 남겼는지 보라. 덕분에 나는 인생이라는 고단한 여정을 남들보다 빠르게 선행해 보았다.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연습게임을 수차례 치뤄 본 셈이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갔던 부모님을 이제야 비로소, 진정으로 존경하게 된다. 내가 받은 유산은 너무 귀해서 금 따위로는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수준이다. 이 글을 쓰며 다시금 확신을 가지게 된다. 나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내가 그들에게 받은 유산이 나를 무너지게 두지 않을 거라고. 어떤 결과가 따르든 반드시 다시 일어설 거라고.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분명 그럴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 나의 부모님은 나에게 일말의 미안함도 가질 필요 없다는 사실을 이 자리를 빌려 전한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물려받았으니, 나의 재산을 잘 운용해 내는 것은 이제 내 몫이다.
플로팅이 망하는 것은 내 탓이겠지만, 잘 된다면 그건 전부 부모님 덕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