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하지만 모든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졸업을 몇 달 남겨두고 학교를 자퇴했을 때, 아버지의 회사가 폐업을 결정했을 때, 워홀을 떠나서 3개월 만에 돌아왔을 때, 그리고 5년 다닌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을 때, 모든 끝은 쉽지 않았고, 왠지 모를 패배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 길을 다시 돌아보면, 마치 그 모든 순간들이 승리도 패배도 아닌 운명이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왜'가 빠진 업무들이 끊임없이 밀려오는 회사생활에 회의감을 느끼던 중이었다. 내년 말 즈음으로 마음먹고 있던 퇴사 시기가 조금 앞당겨지긴 했지만, 결국엔 해야 할 일을 한 거라고 나를 다독였다. 그러나 퇴사 이후의 세상은 상사가 나의 퇴사를 만류하며 했던 말처럼, 그리 녹록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지난날들이 모두 그러했듯, 이 순간도 한참 뒤에 다시 돌아보면 마치 운명처럼 느껴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뿐이다. 그 마음으로 하루에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졸업을 몇 달 남겨두고 학교를 자퇴하자, 나의 최종 학력은 고졸이 되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음에도, 내가 이력서를 내고 면접에 합격해 직장인이 되지는 못할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다.
그러나, 자퇴를 하고 반년도 채 되기 전에 나는 수필 공모전에 당선되며 다시 한번 작가라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다. 그렇게 등단해서 책도 몇 권 내고 작가로 이름을 알렸다고 하면 한 편의 드라마가 되겠으나 인생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애석할 뿐이다.
아버지의 사업이 힘들어지며 전공도 적성도 상관없는 도서 물류 회사에서 경리 비슷한 일을 보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 회사가 결국엔 폐업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20대 중반이 되어 있었다. 그때도 나는 생각했다. 대학 졸업장도 없고, 경력이랄 것도 없는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아무것도 되지 못할 수도 있겠다. 그 시기에는 왠지 내가 나이도 너무 많이 들어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즈음에 나는 결혼을 했다. 이상한 방향으로 튀어버린 것도 같지만, 어쨌든 나는 그즈음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를 결혼을 했다.
결혼 후 첫 1년은 나의 우울감이 최대로 날뛰었던 시기였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될 수 없을 거라는 불안감이 온몸을 감쌌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호주 워홀을 떠나게 된 것이다. 도피가 아니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남편과 함께 캐리어 네 개를 끌고 호주에 가서 나는 약간의 평안을 맞이했다. 그곳에서는 설거지를 해도, 청소를 해도, 흠이 아니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살면 충분히 잘 살고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꿈이 없어도 될 것 같았고, 꿈이 없는 게 당연한 것만 같은 세상에서 나는 새벽까지 일하면서도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평안을 맞이한 나와 도무지 적응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남편 사이에서의 간극이 도저히 메워지지 않았을 뿐. 그 결과로 우리는 3개월 만에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에도 실패한 채 모든 돈을 날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제 나이는 20대 후반이 되었고, 내세울 경력은 아무것도 없고, 대학교 졸업장이 없다는 현실에도 변함이 없다. 당장 살 집은 구했는데 다음 달 월세도 내지 못할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호주를 다녀온 후로 나는 왠지 모를 자신감에 휩싸였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넣기 시작한 지 2주도 채 되지 않았을 때 한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그렇게 나는 브랜드 에디터가 되었다. (졸업장은 없지만) 패션 디자인을 전공했고, (조금 이상한 계간지라 당선에 불응하긴 했지만) 수필 공모 이력이 있는 내가 꽤 적임이라고 생각할 만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 회사는 패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름만 대도 알 만한 회사였고 말이지.
나는 지금 불안하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괜찮다고, 지금껏 괜찮았고 그러니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고 나에게 말해 주려고 쓴다. 지금 이 순간도, 결국은 긴 여정 속 한 지점일 뿐이라고. 나는 제대로 길을 찾아가고 있다고. 목적지는 어디인지 모르지만, 너는 결국 찾아내고 말 거라고.
퇴사를 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직을 하지 않기로 한 결정에는 아직 확신이 없다. 괜히 멈칫거리다 경력의 공백만 길어질까 봐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퇴사를 하고 다시 꿈을 꾸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매년 연봉이 오르고, 고용 불안이 없고, 매달 월급이 또박또박 들어올 때는 오히려 보이지 않던 희망이 아무것도 없는 지금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퇴사를 한 이후부터 나는 다시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 무한한 가능성에 나는 미친 척 미래를 걸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