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 속에서 떠오른 질문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 이 질문을 하기 위해 직접 만나 묻기도 하였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다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사람들이 준 답은 공통적인 내용이 많았다. 그 공통의 내용이 나를 구성하는 요소였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겠지만,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난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단지, 표현하였던 방법이나 결이 조금씩 달랐을 뿐.
미처 모든 사람들에게 던지지 못하였고, 어떤 이들의 질문은 담지 못하였다. 공통적인 답이 대부분이었던 이유도 있다.
"너 놀리는 재미가 있어서."
"너 아저씨처럼 하고 댕기는 게 너무 웃겨서."
이렇게 단적이고 장난 100%인 답을 주는 사람도 있어 글로 이어가기에 '매우' 어려웠다. 생각해보면 이런 유쾌한 이야기도 있어 늘 진지하지만은 않았다.
아쉬운 점에 대해 물었을 때 많은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사람 면전 앞에 두고 안 좋은 이야기 하겠냐'는 지인의 말처럼, 아쉬운 점을 좋은 점처럼 쉬이 이야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만나면서 불편하고 아쉬운 점이 분명 있었을 터인데 말이다. 한편으론 지나고 보면 아쉬운 건은 순간이었고, 좋은 기억만 남아있어 내게 똑같은 질문을 던져도 쉽게 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사실, 내가 지금까지 전하는 이야기가 공감이 되지 않을 수 있다. 내 성정에서 비롯된 이야기인지라 당연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글을 읽으며 단 한 순간이라도 조금의 공감이 되었다면, 그걸로도 충분하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한다면, '나'라는 사람이 형성되는 건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 가장 크지 않을까. 나라는 존재는 누가 만들었을까. 오롯이, 내가 스스로 만들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내 이름을 구성하는 건 무엇일까.
결국, '나'는 나를 알아주는 '너'가 있어야 한다. 나를 알아주는 너가 있음으로, 우리는 나가 되는 것이지 않을까. 그래서 인간은 계속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지 않을까.
언제부터인가, 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더 배우고 고치려 노력한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서 나를 반추해본다. 저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언젠가 내가 다른 사람에게 했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였을 것이니까. 그 언행에 불편했다면, 분명 다른 사람도 불편했을 것이다. 일종의 거울처럼.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지만, 질문의 끝은 없을 것이다. 관계는 여전히 즐겁다가도 힘들고,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다.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 나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걸어가고 있다. 언젠가 다시 한번, 이 질문을 던져본다면 어떤 답이 돌아올까.
'당신은 왜 날 만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