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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원GONGWON Nov 01. 2020

만나는 데 무슨 이유가 있냐.

고등학교 동창 0은 왜 날 만날까.

"만나는 데 무슨 이유가 있냐. 그냥 만나는 거지."


왜 날 만나는지에 대한 고등학교 동창 0의 첫 답이다. 거침없고 직선적인 성격을 가진 0 다운 대답이었다. 특별히 이유를 만들지 않았다. 곧이곧대로 말했다.


"생각해본 적은 없어. 그냥 만나는 거야."


0은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물며 말했다. 라이터로 담뱃불을 지지곤 긴 연기를 내뿜었다.


"담배 끊어야 하는데…. 계속 끊어야지 해도 힘들어서 핀다."

"나도 그래. 운동해야지 하고 안 하는 걸."


차가운 공기가 내리 앉은 밤 사이로 초승달이 떠있다. 그 아래론 사람들이 수놓은 빛들이 초승달을 받치고 있다. 담배연기는 초승달로 흘러갔다. 0가 내뿜는 연기를 따라 나도 입김을 분다. 어느새 날이 차가워졌다는 것, 시간이 어느새 흘렀다는 것을 실감한다.


"다들 목적을 가지고 오잖아. M 걔 봐봐. 영국 넘어가서 연락 한 번 안 하다가 결혼한다고 대뜸 모바일 청첩장 보내고. 이러면 안 되지."


얼마 전에 영국으로 건너간 고등학교 친구 M에게 메시지가 왔다. 해외계정에 영어 이름이라 스팸인 줄 알았는데, 모바일 청첩장이 담겨있는 메시지였다. 따져보지 않았지만 적어도 6년 만의 대화였다. 인스타그램 친구이지만, 어쩌다 한번 좋아요를 하는 정도를 제외하고 왕래는 없었다. 기억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인연 중 하나였다


'몇 년 만에 연락했는데 결혼 소식 전해서 마음이 그렇네. 잘 지내?'

'덕분에 잘 지내. 안 그래도 인스타로 간간이 보고 있어.'

'0와 같이 얼굴 보면 좋겠다.'

'그래. 같이 얼굴 보자.'


이 연락을 한 후 얼마 뒤 나는 오늘 0을 만났다. 0은 나와 만나기 전 M에게 같이 얼굴 보자고 연락을 했지만, M은 나올 수 없었다. 코로나로 인해 자가격리 중이었다. M은 자가격리가 끝나면 결혼식을 올린 후 다시 영국으로 돌아간다. 결혼식을 제외하면 볼 기회는 없는 것이다. 결국 그 메시지 속 대화가 마지막인 셈이다.


"야, 걔가 우리 볼 거 같냐. 어차피 영국 돌아가면 한국 들어오지도 않을 건데."

"그렇긴 하지."

"너는, 그런 목적이 없어. 그냥 만나는 거야. 그런 게 좋은 거지."


일전에 절친했었던 친구와 나눴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명절 때 안부 전하자. 가끔 만나서 소주나 한 잔 하며 이야기나 하자. 힘든 일 있음 연락해라. 지금은 그 친구와 명절에 안부를 전하지도, 술 한 잔도 안 하며, 힘든 일 있으면 연락하지 않는다. 설령 연락이 닿아도 어색함에 의례적인 문답만 주고받았다. 그저 '지금 있는 곳에서 잘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바라볼 뿐이다.


"나 방금 0 너와 학교 다닐 때 기억나. 나 울면서 동아리방 들어왔을 때 네가 나 감싸고 토닥여줬잖아."

"그랬지. 왜 울었는지 짐작이 돼서."

"그때 참 고마웠지."



문득 0과 같이 보내던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크고 작은 일로 심리적으로 힘들었던 나를 붙들어준 사람 중 하나는 0이었다. 주변사람을 힘들게 했다는 자책감에 아무도 없는 동아리방으로 뛰어가 펑펑 울었던 나를, 0은 아무 말 없이 감싸줬다. 그때 그 온기는 아직도 느껴진다.


"왜 우는지 알았으니까."

"은사님이 정말 고생 많았을거야. 그때 이야기하고 나오는 데 울음이 터지더라고."


나는 담뱃불을 끄는 0을 지긋이 바라봤다. 많은 감정이 교차했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으슬한 기운이 올라왔다.


"근데, 내가 한동안 너한테 차갑게 대한 적이 있었잖아."

"그랬나?"

"어. 지금은 기억 안 나는데, 내가 널 너무할 정도로 쌀쌀맞게 대한 적이 있거든?"

"뭔지 기억은 안 나는데 그랬던 것 같다. 근데 기억 안나는 거 보면 별거 아니었겠지."


나는 한동안 0을 일방적으로 무시한 적이 있었다. 주변 친구에게 수소문해 내가 있는 곳까지 온 0을 없는 사람 취급했다. 전화번호도 차단했다. 지금 생각해도 옹졸하기 짝이 없을 정도다.


"그때 내가 너한테 뭘 이야기 안해서 나한테 화를 낸거 같은데."

"그랬던 것 같은데. 그때 내가 왜 너한테 화냈는 지 모르겠어."


글을 쓰는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니, 친구 K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K는 내게 금전을 빌렸는데, 약속한 시일이 지나도 갚지 않았다. 후에 0을 통해 들어보니 배째라는 식으로 갚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이때 0에게 오해가 쌓였고, 한동안 연락을 끊었던 것이다. 물론, 0의 집요한(!) 연락으로 나는 0을 만나 오해를 풀었고, 지금처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년 뒤, 0 역시 K로 인해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정도로 피해를 입었다. 내가 당한 건 새발의 피도 안 될 정도였다.)


"춥다. 들어가자. 내일 출근해야지."

"그래. 뭐했다고 벌써 10시냐."


몇 달 만에 만나 정담을 나누니, 어느덧 밤 10시를 넘겼다. 다시금 서로의 길을 가야했다. 0은 내년 결혼을 앞둔 신랑이 되었고, 집을 어디에 얻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상상 속에 머물었던 내일이, 오늘이 되었다. 길게 느껴진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앞으로 다가올 긴 시간도 짧게 느껴질 것이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지났냐며, 올해도 이뤄놓은 것이 없다면서 허탈해할 것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0와의 만남은 허탈함 없이, 알찬 시간이 될 것이다. 지금도, 앞으로도.


"어머님, 아버님 안녕하시니?"

"그럼, 잘 지내지."

"언제 인사드리러 가야 하는데.."

"놀러 와."

"그래, 연말에 얼굴이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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