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카톡의 주인공

A병원 온라인 담당 A주임 이야기

by 임자못

2025년의 마무리는 깔끔했다. 1월 1일 신정 휴진 안내가 홈페이지, 네이버 플레이스, 블로그, SNS 등 모든 채널에 오타 하나 없이 올라갔는지 몇 번이나 재확인했다. 혹시나 연동 오류로 예약이 잡히지는 않을지 온라인 예약 시스템의 일정까지 완벽하게 잠금 처리를 마쳤다. 온라인 담당자로서 이 정도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찬 바람을 뚫고 병원을 찾았다가 닫힌 문 앞에서 허탈해할 환자들을 생각하면, 쉬는 날 전날이라도 결코 손을 놓을 수 없는 법이니까.


"이만하면 됐다!"


스스로에게 합격점을 주고 오랜만에 칼퇴근을 감행했다. 함께 고생한 팀장님과 대리님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며 훈훈한 덕담을 건네고 병원 문을 나섰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매서운 겨울바람이 얼굴을 때렸지만, 마음만큼은 더없이 산뜻했다.


연말 분위기를 내기 위해 친구들을 만났다. 내일 출근 걱정이 없다는 해방감 덕분일까. 평소 살찔까 봐 눈길도 주지 않았던 묵직한 크림 디저트들도 오늘만큼은 죄책감 없이 입 안 가득 즐겼다. 시끌벅적한 파티는 아니었지만, 서로의 한 해를 다독여주는 딱 적당한 온도의 연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집 근처 과일가게에서 귤 한 봉지를 사서 너무 늦지 않게 집으로 향했다. 거실 소파에 가족들과 나란히 앉아 손끝이 노랗게 변할 때까지 귤을 까먹으며 TV에서 흘러나오는 가요대제전을 감상했다. 화려한 무대와 사람들의 환호 소리. 이 정도면 완벽한 한 해의 마무리였다. 자정의 보신각 종소리가 거실을 채울 때쯤, 나도 기분 좋은 새해를 꿈꾸며 잠이 들었다. 적어도 내일 아침만큼은 알람 소리 없는 고요한 평화를 누릴 수 있으리라 확신하면서.


하지만 인간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었던가. 전날의 늦은 귀가가 무색하게도 몸은 용케 출근 시간을 기억해 내고 아침 일찍 눈을 뜨게 했다.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어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뒹굴거렸다. '오늘 하루는 정말 아무것도 안 할 거야'라고 다짐하며 습관적으로 머리맡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곳엔, 새해 첫 카톡 주인공이 입을 벌린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OOO 병원장님]


병원장님의 이름을 보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외면하고 싶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월급쟁이의 본능은 외면보다 걱정을 앞세웠다. '대체 얼마나 급한 일이면 신정 아침부터 연락을 하셨을까' 하는 불안함이 엄습했다. 혹시 병원에 불이라도 났나? 아니면 홈페이지가 터졌나? 떨리는 손가락으로 메시지를 열었다.

내용은 예상 밖이었다. 아니, 예상을 뛰어넘는 허탈함이었다.


병원에 대한 부정적인 네이버 리뷰를 친히 캡처한 이미지와 함께 [내용 확인 필]이라는 짧은 메시지. 그가 카톡을 보낸 시각은 오전 5시 55분이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흔한 인사 한마디는커녕, 마침표 하나 찍히지 않은 그 메시지는 오직 본인의 눈에 거슬리는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1월 1일 성스러운 신정 연휴를 망치기 딱 좋은 메시지였다.


리뷰의 내용은 장황했다. 병원비가 비싸다는, 어찌 보면 병원이라면 어디든 달릴 법한 흔한 불평이었다. 병원비를 내가 정한 것도, 그 비싼 돈이 내 지갑으로 들어오는 것도 아니지만 온라인상에 떠도는 모든 감정의 쓰레기통은 오직 나의 몫이었다. 전장터 맨 앞에서 아무런 방패도 없이 총알받이가 된 기분. 이런 감정은 겪어도 겪어도 도무지 무뎌지지 않는다.


사실 그 리뷰는 이틀 전부터 인지하고 있던 내용이었다. 이미 원무 과장과 환자의 특이사항을 확인했고, 내부적으로 어떻게 대응할지 논의까지 마친 상태였다. 나는 당연히 중간 관리자인 원무 과장이 보고를 마쳤을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병원장의 세계에서 '절차'나 '사정'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 띈 순간, 그건 즉시 해결해야 할 '비상사태'였다.


침대에 누워 한참을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여 머릿속이 지직거렸다. 하지만 내가 보낼 수 있는 답장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수천 번의 연습으로 다져진 비즈니스용 자아를 끌어내어 엄지손가락을 움직였다.


[네, 원장님. 내용 확인했습니다. 출근해서 바로 대응하겠습니다.]


새해를 맞아 목욕재계까지 계획하며 갓생을 꿈꿨던 의욕은 오전 5시 55분에 날아온 카톡 한 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병원 문을 닫게 할 중대한 사건도 아닌, 그저 '돈이 비싸다'는 환자의 투정 하나가 내 새해 첫 아침을 망쳤다.


결국 나는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늦잠 계획도, 상쾌한 목욕탕 나들이도 다 글렀다. 이대로 이불 속에 있다간 병원장의 얼굴이 천장에 보일 것 같아 목도리를 대충 동여매고 집 앞 무인 카페로 향했다. 텅 빈 카페에 앉아 진한 아메리카노 향을 들이마시며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다시 시작하는 거야. 그 염치없는 카톡 따위에 내 일 년을 망치지 말자.'



차트에는 기록되지 않는 병원의 첫 번째 이야기.

병원장의 시계는 휴일에도, 새벽에도 멈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