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병원 B홍보팀장 이야기
병원 홍보 일을 하다 보면 종종 방송 제작사의 연락을 받는다. 대개는 건강 정보 프로그램을 빙자해 협찬품이나 특정 수술법을 직·간접적으로 홍보할 의사를 섭외하려는 의도다.
홍보팀 입장에서 방송 출연은 언제나 양날의 검이다. 병원의 인지도를 높일 절호의 기회지만 카메라 앞에서 굳어버린 의사의 어색한 표정과 어눌한 말투는 공들여 쌓아온 병원의 이미지를 깎아먹기도 한다. 그래서 섭외 전화를 받으면 일단 머릿속으로 계산기부터 두드릴 수 밖에 없다.
출연을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방송 출연을 극구 거부하는 의사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출연을 극구 거부하는 의사를 설득하는 척하다 적당히 포기하는 건 홍보팀장의 오랜 생존 전략이다. 시작부터 비협조적이라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려 공중파였다. 종편 채널의 숱한 제안과는 무게감부터 달랐다. 공중파 메디컬 프로그램이라면 일단 잡아야 했다.
제작사 측은 특정 사례자의 허리 상태를 진료하고 검사 결과를 설명해 줄 의사를 찾고 있었고, 콕 집어 K원장을 지목했다. 젊은 데다 훈훈한 외모, 전문성까지 갖췄으니 시청률에 민감한 방송국 사람들이 가만둘 리 없었다.(저 얼굴에 공부까지 잘했다니, 신은 참 불공평하다.)
내 입장에서도 K원장의 외모를 무기 삼아 병원의 젊고 세련된 이미지를 알릴 좋은 기회였다. K원장에게 출연 의사를 묻기 전 절차상 P병원장에게 보고를 올렸다. 평소 바쁘다는 핑계로 나를 피하던 병원장은 공중파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즉시 응답했다.
“이번 방송은 제가 나가겠습니다. 아무래도 공중파에는 병원장인 제가 나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하. 누구보다 병원의 얼굴이 되고 싶어 하는 그의 욕망을 간과했다. 젊고 유능한 후배 의사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을 지켜만 보기에는 그의 주인공 의식이 지나치게 강했다. 이 소식을 제작진에게 전하자 상당히 난감해 했다. 결국 나는 "원장님이 방송 경력이 훨씬 많아 그림을 더 잘 뽑아주실 것"이라는 입바른 소리를 하며 간신히 설득을 마쳤다. 그리고 그의 입맛에 맞춰 대본을 정리하고, 그가 선호하는 수술법을 한껏 강조하며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진짜 사건은 녹화 이틀 전에 터졌다. P병원장이 갑자기 출연 번복을 통보한 것이다. 이유는 돌연 잡힌 수술 일정. 충분히 조정 가능한 일정이었음에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방송 펑크는 홍보팀의 신뢰도와 직결되는 일이라 화가 치밀었지만, 감정을 추스를 새도 없었다. 급히 K원장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선약이 있다며 단칼에 거절했다.
결국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방송 경험이 전무한 막내 원장을 대타로 세웠다. P병원장은 대타를 향해 활짝 웃으며 “우리 막내 이번에 데뷔하는 건가?”라는 속 편한 소리나 해댔다.
녹화 당일, 사색이 된 막내 원장의 손에는 병원장을 위해 작성한 대본이 들려 있었다. 메이크업을 받는 내내 대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가 안쓰러워 보였다. 모니터 속 막내 원장은 온몸이 굳어 있었고, 프롬프터를 읽는 시선 처리조차 불안했다. 지켜보는 내 손바닥에도 땀이 흥건했다.
시간이 흘러 본방송 날.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TV 앞에 앉았다. 잘만 나오면 진료실 모니터에 편집 영상을 틀어 막내 원장을 홍보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방송에 익숙지 않은 대타 원장의 분량은 말 그대로 통편집 수준이었다. 이동 시간 1시간, 헤어 메이크업 20분, 녹화 30분. 도합 2시간의 고생이 고작 ‘7초’의 화면으로 증발했다. 병원장의 욕심과 무책임함이 남긴 결과는 허무하게 버려진 나의 노동 시간뿐이다.
차트에는 기록되지 않는 병원의 두 번째 이야기.
병원장의 욕심에 대한 대가는 직원의 다크서클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