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병원 C간호사 이야기
병원 외래 간호사로 일하다 보면 하루에도 수백 명의 환자를 불러 세우고, 같은 설명을 수십 번 반복하게 된다. 퇴근 무렵엔 목이 따끔따끔하기 일쑤고, 특히 어르신이 많이 오시는 날에는 목소리가 쇳소리로 변하기도 한다.
이런 나를 위해 친구가 생일 선물로 오설록의 삼다꿀배티를 보내줬다. 평소 내 돈 주고 사 먹기엔 살짝 망설여지는 가격대라 좋아하면서도 자주 사 먹지 못했는데 나를 알아주는 건 역시 친구밖에 없다.
달콤한 꿀 향과 싱그러운 배의 풍미가 어우러진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면 퉁퉁 부어오른 목 점막이 부드럽게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오전 외래 시작 전 이 차를 한 잔 마시는 날엔 유독 목소리가 맑게 나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정말 목 상태가 좋지 않을 때만 아껴서 꺼내 먹었다.
그날도 목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아아 출근하자마자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사물함에 모셔두었던 티백 하나를 꺼냈다. 곧 은은한 꿀배 향이 외래 진료실을 감쌌다.
"음 향이 좋은데? 무슨 차 마셔?"
지나가던 원장님이 내 컵에서 풍기는 향기에 코를 킁킁거리며 멈춰 섰다. 한겨울에도 '강경 아이스 아메리카노 파'인 줄로만 알았던 그였다. 나는 사회생활용 미소를 장착한 후 큰맘 먹고 소중한 티백 하나를 뜯어 건넸다.
"선물 받은 차인데 원장님도 한번 드셔보세요."
그때는 몰랐다. 호의로 건넨 티백 하나가 '차 셔틀'의 서막이 될 줄은.
그날 이후 내가 이 차를 꺼내는 날이면 원장님은 어김없이 내 주위를 맴돌았다. "오늘도 향이 좋네", "그 차 진짜 맛있더라"며 툭툭 던지는 말 한마디가 꽤 부담이 됐다. 떨리는 손으로 하나둘 내어주다 보니, 상자 속 티백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 목을 위해 아껴둔 비상금이 털리는 기분이었지만, 원장님에게 "이거 비싼 거니 그만 드세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마지막 티백을 아껴두느라 차를 마시지 않던 어느 날 원장님이 기어코 쐐기를 박았다.
"요즘은 그 차 안 마셔? 그거 맛있던데."
나에게 차를 맡겨 놓은 것도, 병원 공금으로 산 탕비실 물품도 아니었다. 오직 나의 호의로 시작된 일이었으나,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원장님은 오히려 나에게 서운함을 내비쳤고, 나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아, 원장님. 제가 생일 선물 받았던 건데 이제 다 먹어서 없어요. '오설록 삼다꿀배티'라는 건데 진짜 맛있죠? 인터넷으로도 주문하실 수 있어요"
브랜드명까지 정확히 알려주었으니 이제는 직접 사 드시겠거니 했다. '원장님이 차를 사서 나한테도 좀 나눠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아주 조금 있었다. 하지만 그는 차(Tea)를 사는 대신 종종 내 곁을 지나가며 허공에 대고 한마디씩 툭툭 던졌다.
"그 차 진짜 맛있었는데, 그치?"
그는 억대 연봉을 받는 의사다. 주차장에는 내 연봉보다 비싼 외제차가 번쩍이며 서 있고, 그가 걸친 옷가지 하나가 내 한 달 월급과 맞먹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고작 차(Tea) 하나 때문에 직원 주위를 맴도는 걸까. 차(Car)는 그렇게 비싼 걸 끌고 다니면서, 정작 마시는 차(Tea)에는 왜 그리 인색한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마시고 싶으면 그냥 직접 사 드시면 될 텐데. 내 목은 여전히 따갑고, 원장님의 그 얄미운 입맛을 채워줄 티백은 이제 내 상자 속에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이제부터는 그냥 따뜻한 생수나 마셔야겠다.
차트에는 기록되지 않는 병원의 세 번째 이야기.
윗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순간, 그것은 곧 나의 '의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