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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Sep 02. 2022

괴혈병과 콜레라

양치와 목욜을 하겠다던 큰 아이가 울상이 되어 뛰어왔다.

"엄마!!!"

"왜? 왜 그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고 입을 삐죽대는 모습이 어디 다친 게 확실하다 싶어 아이의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다친 곳은 눈에 바로 띄지 않았다.

"엄마. 여기 잇몸이랑 이가 이상해. 치실질을 하는데 딱딱한 게 있어서 안 들어가. 꽉 막혀 있어. 피도 났어. 엄마 어떡해?"


아이의 입을 확인해 보니 어금니 유치가 썩어서 크라운을 씌워놨었는데, 그 앞부분 잇몸에 영구치가 자라나고 있다.

"아, 어금니 새로 나고 있네. 괜찮아, 건이야. 치과 가봐야겠다. 많이 놀랐어?"

"엄마, 잇몸에서 피가 많이 났는데 나 괴혈병 아니야? 과일이랑 야채 안 먹어서 괴혈병 걸렸나 봐. 으앙!"


아이는 '괴혈병'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자마자 참았던 눈물이 터지는 듯 으앙 하고 울기 시작했다. <<Why? 질병>>에서 봤던 '괴혈병'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 듯했다. 몇 달 전에 아이가 "옛날에 항해를 오래 하던 선원들이 괴혈병에 걸려서 많이 죽었대요."라며 내게 정보를 전달한 적이 있다.

괴혈병은 비타민 C 부족으로 인해 발생하는 질환으로 잇몸, 근육, 골막과 피하 점막이 약해지면서 피가 나와 그 부위가 몹시 아프며, 혈뇨와 혈변이 생길 수도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아이에게 누구나 양치하거나 치실질을 하면서 잇몸에서 피가 날 수 있음을 설명하였다. 신선한 식재료를 잘 섭취하고 있고 과일이나 야채도 매 끼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먹고 있으니 괴혈병은 아닐 거라고 아이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아이가 잘못 알고 운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나의 옛 이야기도 덧붙였다.


"사실 말이지, 엄마도 그런 적이 있어. 엄마가 중학교 때 콜레라라는 병이 유행했거든. 그게 설사를 하는 병인데 엄마가 학교에서 갑자기 배가 아프고 설사 비슷하게 한 거야. 분명히 콜레라구나 싶어서 조퇴를 했었어."

"근데 콜레라가 아니었어요?"

"집에 가니까 괜찮더라."

"그럼 그냥 평범한 장염?"

"장염도 아니었나 봐. 설사도 안 하고 컨디션은 괜찮았거든. 콜레라에 대한 뉴스를 보고 엄마가 괜히 걱정했던 것 같아."


콜레라는 콜레라균(Vibrio cholerae)의 감염으로 급성 설사가 유발되어 중증의 탈수가 빠르게 진행되며, 이로 인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전염성 감염 질환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콜레라 사건(?)은 마지막 교시인 6교시에 벌어졌다. 수업 시간에 갑자기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간 후 내가 콜레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6교시는 담임 선생님 과목이 아니었기 때문에 담임 선생님을 찾으러 교무실까지 가서 조퇴를 신청했다. 20~30분만 버티면 수업이 끝인데 지금 조퇴하지 않으면 내가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부랴부랴 조퇴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선생님께 콜레라 언급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한창 수업 진행 중인 교실로 가서 가방을 챙기고 집으로 갔다.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조퇴였다. 그러나 집에 가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더는 설사를 하지 않았고 컨디션도 괜찮았다. 참으로 머쓱한 조퇴였다.


이 조퇴로 인해 나는 12년 개근상을 놓치고 말았다. 이 사건 전후로 단 한 번도 결석이나 조퇴가 없었기 때문에 조퇴가 더욱 아쉬웠다. '20~30분만 버틸 걸. 미련하게 콜레라로 단정지어 12년 개근을 놓치다니.'라며 나자신을 탓하고 또 탓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도 한동안은 나를 자책하다가 세월이 오래 되어 잊고 있었는데, 이번에 아이의 괴혈병 해프닝으로 그 당시 콜레라 해프닝이 떠올랐다.


이제는 안다. 12년 개근상을 놓친 이 나의 불성실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님을. 게다가 이제는 아파도 학교에 가서 죽으라던 미련한 시대도 아니다. 오히려 아플 때 쉬어야 나와 타인을 지키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괜찮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럴 만했다'며 더는 자책하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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