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O Sep 28. 2022

누구에게나 글쓰기는 어려워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를 읽고

에세이스트, 소설가, 잡지 편집 기자, 영화감독 등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의 글 모음집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는 제목 그대로 글을 쓰고 싶은 마음과 쓰고 싶지 않은 마음을 담았다. 책을 읽으면서 '전문 작가들도 글을 쓸 땐 이렇구나' 공감도 가고, '내가 뭐라고 그들한테 공감을 하니?' 하면서 읽었다. 얄팍한 위안이지만,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힘이 된다.


이 책을 읽으며 느낀 점을 간단히 요약해 본다. 내 느낌은 괄호 안에 담았다.


1. 글 잘 쓰는 사람도 글 쓰는 일은 괴롭다.


- 글 잘 쓰는 사람도 글이 마냥 재미있지 않다.

- 특히나 글이 밥벌이가 되면 다른 밥벌이 수단과 똑같아진다.

(인간은 왜 이럴까? 좋아하지 않는 일을 밥벌이로 평생 붙잡고 있는 것은 불행한데,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것 또한 다른 류의 불행인 걸까?)

 

 나는 알았다. 그동안 나는 쓰기 위한 준비를 해왔던 게 아니라 오로지 그 일을 하지 않기 위해 피해 다니기만 했었다는 걸. 그게 두려움이나 권태든 다른 무엇 때문이든 간에 나는 이 일이 음악이 그랬던 것처럼 또 하기 싫어졌다는 걸.  그러니까 나는 또 한 번 내가 사랑했던 일을 밥벌이로 삼은 죄로 그 일을 영원히 잃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걸.

- 이석원(전 뮤지션, 현 에세이스트, <어느 에세이스트의 최후> p.70


글쓰기로 밥벌이를 하는 일은 난처한 일의 연속이다. 글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은 (속편한) 사람이라는 편견 아래 놓이곤 하지만 쓰고 싶은 글만 쓰고 싶은 대로 쓰며 사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신선처럼 사는 작가는 어디 있나? 세상 모든 일처럼 글 쓰는 직업에도 신비는 없다. 일을 하고 돈을 받는다.

- 이다혜(<씨네 21> 기자), <쓰지 않은 글은 아직 아무것도 망치지 않았다> p. 76


2. 마감은 작가를 움직이게 하지만 계약과 마감에 묶이면 쓰기 싫어진다.


- 자발적으로 쓰고 싶을 때, 머릿속에 쓰고 싶은 내용이 다 있을 때는 글쓰기가 수월하다.

- 그러나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데 마감은 맞춰야 하면 글쓰기가 고통이 된다.

(나처럼 아무런 속박도 없이 천지분간 못하고 그냥 쓰는 게 행복한 거구나. 비록 글로 인한 수익 창출은 불가할지라도.)


무언가를 쓴다는 행위 자체는 그리 어렵거나,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은 아니다. 쓸 것이 정해져 있으면 안무를 다 외운 무용수처럼 들려오는 음악에 맞춰 무대 위에서 몸을 움직이면 된다. 머릿속에서 이미 한차례 쓰인 말과 글들을 받아 적는 느낌이랄까.
(중략)
쓸 것이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쓴다는 행위를 시작하면 절대 안 된다. 그땐 그야말로 ‘쓰기 지옥’에 스스로 입장하는 격이다. 사실 나는 그 지옥에 자주 빠진다. 마감은 정해져 있고, 쓸 재료는 마련되지 않은 상태로 몇 문장 쓰고 ‘문서정보>문서통계’에 들어가 아직 한참 모자란 글자 수를 세고 또 센다. 글자 수를 센다는 행위 자체가 이미 이 글이 흐름을 타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무대에 오르자마자 안무를 까먹은 무용수처럼, 흐름이 끊긴 채 글을 쓰면 문장이 아니라 문장이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얇고 검은 고통의 흔적들만 흰 종이 위에 남아있다. 그리고 나는 괴로워하며 그 고통의 흔적들이 몇 글자인지 ‘문서정보>문서통계’에 들어가 글자 수 세기를 반복한다. 지옥이다.

- 이랑(아티스트, 에세이스트), <오늘도 춤을 추며 입장합니다, 쓰기 지옥> p. 101~104


경솔하다. 늘 경솔하게 선택하고 차후 열심히 후회한다. 게다가 망각은 빠른 편이라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지금 이 원고를 쓰겠다고 한 것도 조금은 후회스럽다. 쓰고 싶지 않은 마음에 대해 쓰다니. 모순이다. 한편, 써지지 않는 글과 미리 받은 계약금 또한 모순의 대결을 펼치는 중이다. 돈을 미리 받지 말걸. 경솔했다.

- 박정민(영화배우, 에세이스트), <쓰고 싶지 않은 서른두 가지 이유> p. 122


도대체 왜 그 정도로 쓰기 싫은 건데? 아니, 애초에 그럼 왜 쓴다고 했는데?
시간은 2021년 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즈음 난 물이 들어올 때 노를 힘껏 저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기회를 놓치면 잊힐 거야.' '돈을 벌지 못하면 다시 회사에 다녀야 해.(절대 싫어.)' 그래서 들어오는 일은 마다하지 않고 다 했다. 일정을 꼼꼼하게 따져보지도 않은 채 대강 어림짐작으로, 마감일만 주어진다면 미래의 내가 해낼 것이라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믿음으로. 물론 나를 믿은 건 어리석은 짓이었고 해야 할 일은 바윗돌처럼 나를 짓눌러서 꼼짝도 못 하게 됐다.

- 백세희(에세이스트), <무리하기, (마)무리하기> p. 180


나는 가끔 아무것도 쓸 수 없다. 첫 문장을 이렇게 적어놓은 뒤로 오랫동안 정말 아무것도 쓰지 못했고, 이제 마감일을 며칠 앞두고 있다. 망설여진다. 이 원고를 전달하겠노라 약속한 것을 취소할 순 없을까. 그러기엔 역시 너무 늦어버렸을까. 나는 평생 주제 파악을 잘하지 못해 고생하면서 살았는데 왜 또 그걸 잘하지 못했을까.

- 임대형(영화감독), <비극의 영웅> p. 219


3. '나의 글을 누가 읽을까?'에 대한 의심, 회의, 걱정은 누구나 한다.


- 내 글을 누가 읽을지에 대한 회의는 누구나 한다.

- 꼭 내가 아니어도, 나 아니어도 쓸 사람은 많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러쿵저러쿵 해도 이들의 글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지 않은가? 내가 이들에게 공감한다고 해서 내 처지가 이들과 같은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꼭 봐야 될 이야기는 대단한 장면이 아니라 이런 장면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걸까.
내가 좋아하고 믿는 가치를 비주류라고 재단하고 싶지 않지만, 나한테 나오는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비주류 취급을 받고 있는 요즘, 소중한 것을 봐도 주류 비주류로 판단하는 나쁜 버튼이 생긴 게 몹시 성가시다.
(중략)
잘 쓰지도 못할 거면 많이라도 써야 돈을 벌 텐데, 어쩌려고 몸도 작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작고, 쓰고 싶은 마음도 작을까.

- 전고운(영화감독), <내일은 내일의 우아함이 천박함을 가려줄 테니> p. 44~47


물건이나 기술을 파는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로 해당 기술을 보유한 사람은 당신이 아니어도 많다. 쓰고 싶지 않다면 쓰지 않으면 된다. 나나 당신이 글을 쓰지 않는다면 세상의 몇 사람은 아쉬워하겠지만, 어쩌면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겠지만, 그 사람들조차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다른 이들의 글을 읽고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다. 꼭 내가 써야 하는 글이 세상에 있을까?

- 이다혜(<씨네 21> 기자), <쓰지 않은 글은 아직 아무것도 망치지 않았다> p. 78


훌륭하지 않아도 글은 쓸 수 있는 거라고 누군가 말했다. 알고 있다. 훌륭해야만 글을 쓸 수 있다면 내가 아는 그 사람은 글을 쓰면 안 되었다. 내가 훌륭하지 않아서 글을 쓰고 싶지 않은 게 아니다. 글이 훌륭하지 않아서 쓰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글이 훌륭하지 않아도 쓸 수 있는 게 글이라고 또 누군가 말한다. 알고 있다. 하지만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훌륭한 글을 읽고 싶어 한다. 앞서 말했듯이 수요 없는 공급만큼 외로운 일은 없다니까.

- 박정민(영화배우, 에세이스트), <쓰고 싶지 않은 서른두 가지 이유> p. 132~133



다 요약하고 보니 도대체 쓰고 싶은 마음은 어디에?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쓸 사람은 쓰니까 결국 '쓰고 싶다'는 마음이 '쓰기 싫다'는 마음을 이긴다는 거지.

매거진의 이전글 부부, 결혼식, 그리고 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