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끝날 무렵이라 그는 기숙사로 다시 올라왔다.
"내일은 뭐 해?"
"내일? 내 동생네 학교 축제 해서 거기 가보려고."
"누구랑?
"나 혼자."
"나도 갈까?"
"네가 여기까지 온다고? 왜?"
8월 중순, 대학교는 아직 여름 방학이었지만 고등학교는 개학을 하였다.
내 동생은 여고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 학교는 축제를 제법 크게 했다.
생물반이었던 동생은 축제 몇 주 전부터 잎맥을 만든다고 나뭇잎을 주워 다니며 준비를 했다.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축제가 없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축제는 어떤 분위기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동생이 꼭 와 달라고 했으므로 동생네 축제에 가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우리 집에서 동생네 학교는 걸어서 5분밖에 안 걸렸다.
그런데 나와 통화하고 있는 그는 여길 왜 온다는 건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한낱 고등학교 축제일 뿐인데 두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를 굳이 오겠다고? 나는 그가 남중, 남고를 나와 공대에 들어가서 여고라는 곳에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됐다고, 오지 말라고 해도 그는 뿌득뿌득 오겠단다.
축제 날 나는 개나리색 원피스를 입고 집을 나섰다. 사실 난 치마를 잘 입지 않았으나, 대학생이 됐어도 잘 꾸미지 않는 딸을 위해 엄마가 사다준 원피스가 여름 내내 놀고 있었으므로 그 옷을 입어주었다. 요즘 말로 '꾸안꾸 (꾸민 듯 안 꾸민 듯)' 스타일이어야 하는데 '나 꾸몄소'라고 외치는 옷인 것 같았다. 나는 창피함에 집을 나오자마자 집에 다시 들어가고 싶었지만 약속 시간이 되어 어쩔 수 없이 나갔다. 그렇게 지하철역에서 그를 만나 동생네 학교에 가게 됐다.
대학생 오빠를 대동한 대학생 언니의 출현에 열광한 것은 내 동생 뿐이 아니었다.
동생네 생물반이 우릴 구경하느라 난리였다.
"니네 언니 남자친구 멋있다!"
고등학생의 날것 그대로의 표현이란!
남자친구도 아닌데... 게다가 얘가 멋있다니.
쥐구멍에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나는 여중, 여고, 심지어 여대를 다녀서 남자와 어딜 다녀본 기억도 없는 데다가 이렇게 동생 친구들의 관심마저 받게 되다니 역시 혼자 올 걸 그랬다며, 후회 또 후회했다.
그는 싱글벙글했다. 이런 관심 익숙하다는 표정?
동생네 축제는 내가 그의 외모를 객관화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나한테 그냥 어린 시절 모습과 똑같은 남자애였는데,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니 키 크고 깔끔하고 옷도 잘 입어 인기 많을 만한, 그래서 본인도 본인의 인기를 알고 있는 남자였다.
축제를 구경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잎맥 책갈피만 몇 개 사가지고 후다닥 나와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우리 동네는 서울 끝자락이라 몇 정거장이라도 더 나가야 그가 집에 가는 길이 편할 것 같아서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저녁을 먹으며 무슨 얘길 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다만, 그는 날 보며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자꾸 웃었고 나는 그를 보는 게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헤어질 때가 되어 먼 길을 가야 하는 그를 빨리 보내려는데 그가 한사코 집까지 데려다 주겠단다.
"우리 집 앞까지 가면 넌 집에 언제 가?"
"내가 알아서 갈 테니까 걱정 마."
"아니, 너랑 나랑 반대 방향이라니까."
"아는데 데려다 준다니까. 그냥 가자면 가자."
집 앞으로 가면서 그는 손을 내밀었다.
"어? 손을 잡자고?"
나는 당황하여 동네가 떠나가라 큰소리로 말했다.
"야, 너는...그걸 말로... 그래서 싫어?"
"아, 아니, 아니야."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아, 이러려고 얘가 데려다 준다고 한 거였구나.'
나는 당당한 척했지만 부끄러워 목이 거북이처럼 쑥 들어갈 지경이었다. 심장은 주책맞게도 날뛰었다.
연애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