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O Nov 23. 2022

우주 먼지의 의미

김민섭,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를 읽고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가기로 한 것은 나 나름대로는 어떤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사명감'이 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더 공부하고 연구하면 뭔가 의미가 있을 것이라, 아니 의미를 만들어 낼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내가 학부 때 전공에 미쳐 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전공은 애증의 관계였다. 그럼에도 가슴 뛰는 뭔가가 있었기에 그걸 찾으러 대학원에 입학했다.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의 김민섭 작가가 밝힌 대학원 진학 동기를 읽고 나는 15년 전 내 모습을 보았다.

"대학을 졸업한 나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고 하면,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때는 그게 정해진 인생의 길 같은 것이라고 믿었다. 글을 쓰는 것도 좋았고 소설을 읽는 것도 좋았으니까, 그 좋아하는 것들을 평생 곁에 두고 싶었다. 그러려면 대학원에 가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크게 고민하지 않고 현대 소설 전공의 석사 과정생이 되었다."

- 김민섭,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 p. 23


나는 누구나 인정해 주는 도서관 덕후나 책벌레가 아니었다. 글이야 싸이월드에나 끄적였고 책은 오로지 소설만 읽었지만 인문학도가 되고 싶었다. 인문학이 세상을 밝혀 주리라. (나는 비록 인문학 서적을 안 읽을지언정.)


나 나름대로 확실했던 진학 동기는 막상 대학원에 들어가고 나니 '정체 모를 것'이 되었다. 나에게 세부 전공을 물어보는 선배들한테 "한두 학기 수업을 들어보고 결정하려고요."라고 대답하면 '뭐 이런 게 다 있지?'란 시선을 받았다. 나는 세부 전공조차 정하지 않고 대학원에 진학한 '모질이'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정도로 막연했으면 입학하지 않는 게 맞았겠지만 그 당시는 알지 못했다.


수업을 들으면서 나는 점점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었다. 석사 수업은 교수님이 지정한 책을 챕터별로 발제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한 과목당 발표는 2~3주 간격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밤에도 낮에도 번역을 하여 발제 자료를 만들었다. 수업 시간엔 준비한 발제 자료를 줄줄 읽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돌아가며 발제를 하면 한 학기에 책 한 권은 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뿐이었다. 책의 내용만 이해하는 것이지, 의미 찾기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학부생 때도 발표 때 문학 작품의 의미를 찾고 그 의미에 대해 대중에게 발표했건만, 석사는 그런 의미 찾기를 더 심화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우리 학교는 그렇지 않았다. '어디 석사 과정생 나부랭이가 의미를 찾으려 들고 있어?'라는 무언의 분위기가 있었다. 더 공부하면 찾아질 것이라고 믿는 듯했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이다.)


김민섭 저자는 그 당시 자신을 '우주의 먼지'였다고 표현했는데, 내 마음이 딱 그랬다. 처음에는 대학원 수업이 이렇게 진행되는 게 맞는지 의문이라도 품고 있었지, 나중에는 그런 의식조차 없이 무기력하게 사그라들었다. 난 우주의 먼지처럼 쓸모가 없구나. 나의 존재 가치란 대체 무엇일까.


"연구실에 앉아서 모르는 한자를 그려 나가는 동안 나의 마음은 잘게 쪼개졌다. 어떤 구조적인 폭력보다도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에서 오는 절망이 개인에게는 더욱 아픈 법이다. 첫 문단에서 나는 대학원 공부가 너무 어렵거나 너무 재미가 없거나 너무 쓸데가 없었다고 써 두었지만,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너무 쓸모없는 인간이 아닌가, 하는 심정이 되고 말았다."

- p. 32~33


'판본 비교 연구' 수업 준비를 위해 한 소설의 신문 연재본과 단행본을 비교하면서 달라진 부분을 찾는 저자의 모습을 보고 저자의 친구는 그건 왜 하는 건지 물어본다. 그리고 "네가 하는 일이 이 사회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 그런 게 있다면 알고 싶어. 말해 줘." 하고 다시 물었다. 이 질문에 저자는 혼자 연구실에 앉아 공부하는 것이 개인의 기쁨이나 성과 외에 이 사회와 연결되지 않는다고 깨닫고 가라앉는다.

(p. 34~37 요약)


고백하자면 나는 그다지 사회적인 인간이 아니다. 내가 이 사회에 어떤 공헌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단연코 단 한 번도 없었다. 이타성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나는 철저한 개인주의자다. 그런데 내가 하는 일이 단 한 명에게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다. 누군가는 내가 한 일에 도움을 받든 감동을 받든 해야 할 거 아닌가. 아니면 일말의 공감이라도. 그러나 대학원을 다닐 때 나는 그런 감정을 느끼기 힘들었다. 남들에게나 나에게나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저자는 몸과 마음이 깎여 나간 석사 과정생 때 오랜만에 헌현을 하러 간다. 아마도 자신의 쓰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헌혈 후에 '저 피는 내가 쓰는 논문과는 다르게 누군가에게 쓰이겠구나, 그러니까 저건 사회적인 물건이겠구나.'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 순간, 그의 몸은 더 이상 먼지가 아니었고 그는 자신이 사회적인 존재임을 자각하게 된다. (p. 40~41 요약)


나라는 존재가 가치 없다고 느꼈을 때 나는 어떤 행동을 해 보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떠오르지 않는다. 무언가를 해 보려고 시도하기보다는 무기력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적어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자각이 있었다면 그렇게 무기력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부터 회사에 들어와서까지 나에게 심리 상담을 요청하는 이들이 한두 명씩 있다. 친한 회사 동기는 나를 '멘털 테라피스트'라고 부른다. 나와 이야기하면 마음이 정리되고 편안해진다고. 물론 정식 상담은 아니다. 심리학이라고는 대학 때 교양 심리학 한 과목 들은 게 다다. (심리학 복수 전공을 할까 하고 교양 심리학을 들었는데 나와는 맞지 않았다. 성적은 괜찮았으나 심리학과 과목을 더 듣지는 않았다.) 그 동기는 매번 나한테 묻는다. "언니 전공 심리학과 아니었어?" (아니라니까!)

'야매 상담'이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뿌듯하다. 나의 쓸모를 자각했다기엔 너무 거창하고,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하는 경험을 쌓았다 정도로 정리한다.


글을 쓰면서 늘 고민한다, 나는 왜 쓰는지. 쓰면서도 내 글이 의미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나 혼자만 만족하자고 쓰는 건 분명히 아니다. 누군가는 읽어 줬으면 좋겠고, 공감해 주면 더 좋겠고, 웃어 주거나 감동해 주면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니까 아마 나는 글을 통해 "타인과 연결될 수 있고 타인에게 쓰임이 있는(p.41)" 존재가 되고 싶은가 보다.


인간은 이 거대한 우주에서 먼지 같이 작은 존재다. 모두가 마찬가지다. 인간이 의미 있는 일을 하든, 의미 없는 일을 하든 우주 관점에선 큰 상관이 없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이 의미 없다고 결론 내리면 삶이 무기력하다. 내가 하는 행동이 몇 사람에게라도 통해야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또 쓴다. 기왕이면 몇 사람이 아니라 몇십 명, 몇백 명, 몇천 명에게 가 닿을 수 있는 글을 쓰면 좋겠지만, 그렇게 안 된다 하더라도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오늘도 우주의 먼지는 몇 사람에게라도 가 닿으려고 발버둥을 쳐 본다.




+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의 중요한 키워드는 '연대와 연결'이라 이에 대해서도 한 번 써보고 싶은데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글 쓰는 것도 힘들었다. 하아... 먼지 같은 필력이여!

매거진의 이전글 덜 괴로운 회사 생활을 위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