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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May 18. 2023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니

둘째 아이가 학교에서 '미래 일기'를 썼다. 미래 일기란 미래의 특정 시점의 일들이 일어났다고 가정하여 쓰는 일기다. 아이는 다가올 주말의 일을 미래 일기로 썼다.


점심에는 아빠가 오랜만에 닭고기밥을 만들어줬다.

엄마가 반반유치원 게임을 허락해줘서 반반유치원 게임을 했다.

저녁에는 아빠가 오므라이스를 만들어줬다.


주말이 되자 아이가 아빠에게 닭고기밥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닭고기밥이란 오야꼬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전에 남편이 몇 번 만든 적이 있다. 남편은 안 그래도 오야꼬동을 만든 지 오래되어 한번 만들려고 했다며 기꺼이 오야꼬동의 재료인 닭다리를 사 와서 오야꼬동을 만들었다.


닭고기를 별로 안 좋아하는 첫째는 오야꼬동이 싫다고 투덜댔지만 둘째는 싱글벙글대며 오야꼬동을 먹었다.

"닭고기밥 맛있어! 내 미래가 이루어졌네? 엄마가 반반유치원 게임만 허락해준다면 미래가 진짜 이루어질 텐데!"


우리 집은 주말에만 아이에게 게임을 허용하고 있는데, 모바일 게임 대신 닌텐도나 노트북으로 마인크래프트만 하게 한다. 탭이나 핸드폰으로 하는 모바일 게임은 종류가 워낙 많아 어떤 걸 허용하고 어떤 걸 제한할지 애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아이가 반반유치원 반반유치원 노래를 한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그리는 그림은 죄다 반반유치원 캐릭터고 일상 대화도 반반유치원 캐릭터를 빌어 얘기한다. 반반유치원은 요즘 초등 저학년 남자 아이들에게 유행인 공포 게임이다. 몬스터 캐릭터들은 귀엽지만 배경이 어둡고 음악이 으스스한 방 탈출 느낌의 게임이라 아이 정서에 그다지 좋지 않을 것 같아 허용하지 않았었다. 아이가 하도 원해서 반반유치원 게임 리뷰를 보니 생각보다 무섭거나 복잡한 게임은 아니었다. 그래서 무료인 반반유치원 챕터 1만 해보기로 했다.


그토록 기대하던 반반유치원을 해본 아이는 생각보다 재미없었다고 소감을 말했다.

"오필라 버드의 알 7개를 찾아야 다음으로 진행되는데 알을 못 찾아서 다음으로 진행이 안 돼! 재미없어서 게임 삭제했어."


저녁이 다 되어 아이가 잠이 들었다. 첫째는 먼저 아빠표 오므라이스를 먹으며 내심 걱정했다.

"규가 안 일어나면 어떡해요? 오므라이스까지 먹어야 규의 미래 일기가 완성되잖아요."

둘째를 살살 깨워 식탁으로 데려왔다. 비몽사몽 하던 아이는 오므라이스를 보자 좋아했다.

"와! 나 미래가 다 이루어졌어! 닭고기밥 먹었지, 반반유치원 했지, 오므라이스 먹지. 진짜 신기해!!!"


미래가 이루어진 건지, 미래를 만든 건지 몰라도 미래 일기가 현실이 되었다.

나는 마침 얼마 전에 읽은 김연수 소설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생각났다.




지구가 종말 할 것이라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주목받던 1999년, 대학 2학년 남자인 '나'는 '지민'이라는 여자 동기를 짝사랑하여 고백한다. 지민은 고백을 받아들이는 대신 동반자살을 제안한다. 둘의 동반자살 얘기를 들은 '나'의 외삼촌은 지민 엄마의 소설을 빌어 말한다. (지민의 엄마는 소설가였는데 소설이 판금된 이후 정신착란으로 병동에 감금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나의 외삼촌은 출판사에서 오랫동안 일하여 지민 엄마의 소설을 알고 있다.)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중략) 안타까운 건 이런 멋진 소설을 쓰고서도 지민씨의 엄마가 이십 년 뒤의 지민씨를 기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에요. 가장 괴로운 순간에 대학생이 된 딸을 기억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선택은 달라졌을 겁니다."*


이후 나와 지민은 신과 채널링할 수 있다는 영매 줄리아를 찾아가서 두 가지 질문을 한다. 나는 지구가 멸망하는지를 묻고, 지민은 내가 계속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지를 묻는다. 신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지구는 멸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혼할 것이다. 그러니 죽어서는 안 된다."**


20년 후에 나와 나의 아내인 지민은 맥주를 마시며 그때를 회상한다.

"그런 놀라운 말을 어떻게 믿겠어? 그런데 살아보니까 그건 놀라운 말이 아니라 너무나 평범한 말이더라.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고 우리는 죽지 않고 결혼해 지금 이렇게 맥주를 마시고 있잖아. 줄리아는 그냥 이 사실을 말한 거야. 다만 이십 년 빨리 말했을 뿐. 그 시차가 평범한 말을 신의 말처럼 들리게 한 거야. 소설에 미래를 기억하라고 쓴 엄마는 왜 죽었을까? 그게 늘 궁금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아. 엄마도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완벽한 미래'가 아닌 '평범한 미래'에 대한 확신일지도 모른다. 삶이 막막하고 힘에 부칠 때 이 시기가 지나가면 평범한 미래가 다가올 것임을 상상해 보자. 소중한 사람과 맥주를 마시고 오야꼬동을 먹고 오므라이스를 먹고 게임을 하는,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니. 아, 좋다!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문학동네

* pp. 29~30

** p. 33

*** p.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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