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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May 24. 2023

한낮의 맥주

요가가 끝나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면서 점심으로 어떤 메뉴를 먹을지 머릿속으로 바쁘게 고민했다. 집이었다면 대충 한 끼를 때웠을 것이다. 라면을 끓여 먹거나 있는 밥에 계란 프라이를 넣어 비벼 먹었겠지. 그러나 기왕 외출하여 외식을 하는 김에 마음에 쏙 드는 메뉴를 먹고 싶었다. 도서관에서 나올 때까지 메뉴는 떠오르지 않아서 일단 걸었다.


걷다가 동네의 태국 음식점에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동남아 음식을 먹은 지도 오래됐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신중하게 살펴봤다. 새우 팟타이로 결정했다. 팟타이엔 맥주가 어울린다. 방콕에서도 푸켓에서도 점심에 팟타이와 맥주를 먹었다. 한낮에 한가로이 맥주를 마시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매력이다. 맥주를 시킬까 말까 고민하다가 새우 팟타이만 주문하였다. 한 시간 후면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한다. 게다가 생맥주가 7,000원이나 한다. 웬만한 밥 한 끼 값이다. 하긴 요즘 밥값이 많이 올라서 7,000원으론 밥 한 끼 먹는 게 어림도 없다. 고물가 시대에 식당에서 생맥주를 시키는 것은 사치다. 팟타이로 만족하자.


주변을 둘러본다. 바깥 테이블에 아저씨 둘이 앉아 있다. 아저씨들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내가 그토록 고민하던 생맥주가 아니던가! 잔에는 '하이네켄(Heineken)'이라 쓰여 있고, 영롱한 노란 빛깔이며, 거품이 풍성하고, 잔의 겉면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다. 저 현상은 우리 초5 아들이 최근에 과학에서 배웠다는 '응결(結)'인 것이다! 맥주가 그만큼 시원하다는 증거겠지.


결국 나는 생맥주를 주문하고 말았다. 여행에서 느꼈던 한낮의 여유를 일상에서라고 느끼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내가 회사에 있을 때 그토록 갈구하던 것이 바로 평일 낮의 여유 아니던가! 팟타이와 생맥주로 최고의 점심을 만들자.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 받은 맥주의 모습이 뭔가 이상하다. 거품이 부족한 것까진 그렇다 치는데, 탄산의 기포도 올라오지 않고 잔의 겉면에도 시원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한 모금 쭉 들이킨다. 와! 이렇게 안 시원한 맥주는 중국에서 먹어보고 처음이다. 중국에서는 시원한 맥주를 따로 요청하지 않으면 상온의 병맥주나 캔맥주를 갖다 준다. 시원한 맥주를 보유하지 않은 식당도 있다. 어쨌든 청량하고 시원함이 생명인 생맥주건만 이건 너무하다. 직원에게 맥주가 너무 시원하지 않다고 말했다.

"안 시원하시죠? 온도가 좀 올라갔더라고요. 다른 잔에 다시 좀 드릴게요."


직원은 다른 잔의 반 정도 맥주를 따라 왔다. 거품이 충분하고 기포가 퐁퐁 올라오고 겉면에 시원한 기운이 가득하다. 아쉽게도 양이 적었다. 원래 잔과 다른 잔의 부피가 달라서 얼마만큼의 맥주를 갖다 준 건지는 모르겠으나, 하이네켄 한 잔은 확실히 아니었다. 원래 잔의 맥주를 버리고 새로 가득 따라줘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지만 굳이 따지지는 않았다. 평화로운 오후이고 싶었다. 항의하며 열을 올리는 대신, 직원이 나의 과음을 막아주는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새로 받은 맥주가 시원하고 맛있어서 더 아쉬웠다. 역시나 여행지에서 누렸던 한낮의 여유를 일상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맥주를 주문하지 않았다면 나는 행복했을까? 아니다. 아마 나는 바깥 테이블을 계속 힐끔거리며 맥주를 시킬까 말까 끝까지 고민했을 것이다. 반쪽짜리 아쉬운 맥주지만 조금이라도 즐겼으니 됐다.

"여기 맥주 한 잔 추가요!"

바깥 테이블 아저씨가 맥주를 추가한다. 잠시 후 직원이 충분한 거품에 영롱한 빛깔에 겉면에 응결 현상이 한창 진행 중인 하이네켄 맥주를 바깥으로 가지고 나간다. 저게 내게 왔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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