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이런 게 에세이지. 일상에서 포착한 소재로 시작하여 독자에게 울림을 주는 글. 에세이란 깨달음을 주어야 한다는 시각으로 보니 내가 쓰는 글은 '에세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좀 그렇다. 나는 표면적인 내용만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애초에 내가 너무 얄팍하게 사유하는 것 같은데. 아아, 왜 내 글엔 깊이가 없을까!
며칠 고민하고 있자니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라는 단편소설이 생각났다. 소묘를 잘 그리는 젊은 여자 화가는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닿지만 아직 깊이가 부족하다'는 평론가의 말을 듣고 '왜 나는 깊이가 없을까' 고민하게 된다. 평론가의 비평이 신문에도 실리면서 사람들의 입에까지 오르내리자 그녀는 자신이 왜 깊이가 없는지에만 몰두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그녀에게 '깊이에의 강요'를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평론가인가, 대중인가, 그녀 자신인가.
야구 예능 프로그램인 <최강야구>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신재영 투수가 연습을 마치고 김성근 감독에게 묻는다.
"감독님, 저는 선발 안 뛰나요?"
김성근 감독은 대답한다.
"야구는 선발이 있으면 중간이 있고 마무리도 있고, 각자 제 위치가 있는 거야."
경기 초부터 좋은 분위기를 만들며 공을 오래 던지는 선발 투수가 있는가 하면 중간에서 던지면서 승리를 지키거나 추격할 기회를 만들 수 있게 해주는 중간 투수가 있고, 얻어낸 점수를 끝까지 지켜내는 마무리 투수가 있다. 감독은 선수의 장단점과 특징에 따라 적절한 위치에 기용한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사람마다 각기 특징이 다르다. 저 사람의 장점이 좋아 보인다고 내가 가져오려 해도 배울 수 있을지언정 내 것이 되진 않는다. 그저 나의 특징에 맞게 내 위치와 역할을 찾으면 된다.
글쓰기는 사람의 특징이 아주 잘 드러나는 매체다. 글 쓴 이를 직접 알지 못해도 글을 통해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내가 '깊은 사유'에 대해 몰두하는 동안 이웃 작가님은 나에게 '유머 있는 게 부럽다'는 말을 해주었다. 현실 세계에서 나는 그리 유머러스한 사람은 아닌 것 같으나, 내 글에는 유머가 묻어 있었다는 뜻일 게다.
깊은 사유를 바탕으로 깊은 울림을 주는 글을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글을 쓰는 사람도 있다. 각자 제 역할이 있는데 나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나는 자신에게 '깊이에의 강요'를 하지 않기로 한다. 그냥 나답게 쓰다 보면 누군가는 공감할 것이고, 누군가는 좋아해줄 것이다. 몇 사람에게라도 가 닿으면 그걸로 성공이다. 어차피 베스트셀러도 전 세계 사람 누구나 읽는 거 아닌데 뭐. (그것도 아니라면 개인 소장용으로라도 보관하자. 나 혼자라도 즐거우면 됐지.)
그나저나 이번 글에선 '유머' 찾는 게 쉽지 않아 보인다.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이는 유머, 잘 찾아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