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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Dec 13. 2021

FA에 나가도 손색없는 남편

연애 초보 시절을 잊은 그대에게

나와 남편은 20대 초부터 연애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아직 40대 초임에도 벌써 인생의 반을 함께 한 사이가 되었다!


나는 결혼하고서 남편의 좋은 면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남편은 따뜻하고 안정적인 사람이다.

내가 뭔가를 실수했을 때 내 탓을 하지 않고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해주며 면박을 주는 일이 없다.

내가 다리에 쥐가 나서, 혹은 방에 모기가 있어서 자는 남편을 깨우면 그는 한 번도 짜증 내며 일어난 적이 없다. 잠결이면 짜증이 날 법도 한데 비몽사몽한 채로 정성껏 다리를 주물러 주고 최선을 다해 모기를 잡아 주었다.

맞벌이 부부로서 집안일과 육아를 부부가 함께 해야 한다는 인지가 있고, 대화할 때 내 말을 대체로 잘 들어주는 편이다.


남편은 최근에 내향인과 외향인의 특징에 대해 알게 되더니 그동안 설명되지 않던 자신의 마음이나 행동이 자신이 극내향인이었기 때문임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나는 극내향이라 어디 낯선 데 가려면 아직도 부담되고 싫어. 초행길도 싫고."

"그래. 그런 자기가 혼자 해외 출장까지 갈 수 있게 된 건 다 내 덕분이다."

"그래, 맞아. 자기랑 여행 다니면서 많이 나아졌지. 그렇지만 너도! 옛날에 비해 많이 발전했어."

"그래, 매사에 부정적이던 내가 안정을 찾게 된 건 남편 덕분이긴 하지.


지금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훌륭한 남편이지만 그에게도 연애 초보 시절이 있었으니...




남편과 내가 사귄다고 했을 때 성당 성가대 선배 오빠들은 S (남편)가 아깝다고 말했다.

남편과 나는 성당 성가대에서 만났다. 처음 2년은 선후배로 지내다가 나중에 사귀게 되었는데 선배들이 반은 진심, 반은 놀리는 말로 S가 아깝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발끈했다.

"아니, 왜요? 난 내가 아까운데요?"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오빠들이 남자친구로서 이 사람의 모습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내가 매일매일 사리가 나올 지경인데!'

"왜? S 착하잖아. 잘해줘."


형들의 귀여운 막내

S는 성가대 남자 막내였다. 남자 막내는 할 일이 많았다. 막중한 할 일은 아니다. 성가대 연습 전에 미리 가서 악보 책을 옮겨놓는 일, 연습이 끝나면 뒤풀이 장소에 부리나케 가서 자리를 잡는 일, 단골 술집이 다 찼을 경우 다른 자리를 섭외하는 일 등이다. S는 남자 후배가 들어와서 자신이 막내에서 벗어날 수 있길 기다렸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여자 후배만 들어오고 남자 후배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 여자 후배가 나였다.)

어쨌든 2년 동안 남편은 형들 말을 잘 듣고 순한 막내였다.

성가대 오빠들은 아주 친해서 평일에도 PC방에서 게임을 하거나 동네 술집에서 술을 마시곤 했다. 그 당시 1주일에 두 번은 연습 때문에 만났기 때문에 나는 '왜 저들은 1주일에 두 번 만나는 것도 모자라 다른 날에까지 만나는가?'라고 생각했었다.


동네에서 만나

앞서 말했지만 우리는 2년 간은 선후배로 지내다가 어쩌다 사귀게 되었다. 나는 연애를 시작하면서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서로의 학교 앞에서 만나기, 괜찮았던 식당 소개해주기, 같이 하교하기 등등.

그러나 집돌이 S는 그런 제안을 좀처럼 하지 않았다.

내가 "수업 언제 끝나? 내가 이따 오빠 학교 앞으로 갈까?"라고 물어보면

"어차피 집에 갈 거 아니야? 동네에서 만나."라고 대답했다.

동네, 동네, 그놈의 동네!

 

내가 이따 전화할게

S는 형들과 PC방에서 게임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 당시 한창 유행이던 스타 크래프트.

여자친구 생기면 같이 게임하는 게 로망이었다길래 썩 내키진 않았지만 S와 PC방에 가서 스타 크래프트를 배우려고 시도한 적이 한 번 있었다. 재미도 없고 하는 방법도 잘 모르겠길래 결국 포트리스만 하고 나왔지만.

나는 게임을 안 해서 게임의 중대함이나 시급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S는 연락을 잘 안 하는 편이었는데 특히나 PC방에 갔을 때는 더욱 그랬다. 하도 연락이 없어서 S에게 전화를 하면

"내가 이따 전화할게."라며 끊었지만 그 '이따'는 내일이 되기도 하고, 3일 후가 되기도 했다.

이럴 거면 그냥 게임하면서 날 짝사랑하라고... 연애 말고!


그러나, 부담스러운 애정 표현

사귄 지 얼마 안 됐을 때부터 S는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사랑한단 말에 난 기뻤다기보다 솔직한 심정으로 '아니, 왜 이러세요. 날 얼마나 안다고요?'라는 느낌이었다. 사귄 지 얼마 안 됐을 땐 호감 정도지, 사랑은 아니지 않나?

날 만날 때마다 예쁘다고 말해줘서 좋았는데, 어느 날은 "네가 송혜교보다 더 예뻐."라는 망언을 하여 사람을 당황시켰다.

"저기, 칭찬도 정도껏 해야지. 송혜교는 너무 아니지 않아?"

"내 눈엔 그렇다는 거지."

또 어느 날은 날 "애기야."라고 불렀다. 이때 난 정말 기겁했다.

"애기야가 뭐야? 내가 왜 애기야?"

"애기 같아. 애기라고 부를 거야."

으악! 원래 연인들 사이에 그런 호칭을 쓰나? 거침없는 애정 표현이 나는 많이 부담스러웠다.

훗날 '파리의 연인'에서 박신양이 "애기야, 가자."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저런 표현을 쓰는 사람이 또 있다니! 애기는 연인 사이에 쓸 수 있는 호칭이었구나.'


약속 시간에 집이라고?

"성가대 연습하기 전에 미리 만날까?"

S가 말했다.

"좋지. 4시까지 성당 가야 하니까 그럼 2시 반에 만나."

그러나 약속 시간이 되어 약속 장소에서 전화를 하니 S는 아직 집이었다.

"미안, 아직 집이야. 사정이 있었어. 빨리 나갈게."

나는 너무 화가 나서 나오지 말라고 했다. 늦는다고 미리 말한 것도 아니고, 약속 시간에 집이라니.

내가 그대로 집에 갔는지, 헐레벌떡 나온 남자친구를 만났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성가대 연습 시간엔 한 번도 늦은 적이 없는 성실한 사람이 여자친구와의 약속은 이렇게 소홀하게 생각하는구나, 라는 강한 인상만 남아 있을 뿐.


돈이 없어서 못 만나겠어

또 한 번은 S를 만나러 나가려고 준비하는데 S에게 전화가 왔다.

"있잖아, 오늘 안 만나면 안 될까?"

"왜?"

"돈이 없어서 못 만나겠어."

"돈은 내가 내도 되니까 준비하고 나와."

"아이, 그래도 좀."

나는 데이트할 때 남자와 여자가 공평하게 돈을 내야 한다는 주의였기 때문에 남자친구가 밥을 사면 내가 커피를 샀다. 지난번에 남자친구가 밥을 샀으면 이번엔 내가 밥을 사기도 하고 그렇게 균형을 맞췄었는데, 돈이 없어서 못 만난다니! 돈이야 내가 내도 되는데 약속을 취소하니 화가 났다.

PC방 갈 돈, 담배 살 돈은 있으면서 나 만날 돈은 없다는 것에도 화가 났다. 심지어 전에는 돈이 없대서 성당 로비에서 100원 짜리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데이트한 적도 있었는데 오늘은 그 100원마저 없다는 것인지.

S는 화가 난 내가 무서워서 헐레벌떡 약속 장소에 나왔고, 나는 비싼 걸 사면 남자친구 자존심이 상할까 봐 맥도널드에 가서 300원 짜리 아이스크림을 샀다.


몸속에서 사리가 나올 것 같았다.

나도 연애 초보이건만 더 초짜인 남자를 자식처럼 기르고 제자처럼 가르쳐서 힘겨운 연애 생활을 하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저녁에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옛날 얘기를 많이 한다.

옛날 얘기를 하다 보면 남편은 지금 확실히 괜찮은 사람이 됐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자기는 이제 FA(Free Agent, 자유계약) 시장에 나가도 손색이 없겠어. 옛날에 비해 진짜 많이 발전했다."

"아니 왜 날 FA에 내보내려 그래? 난 너랑 종신 계약했어."


+ 송혜교보다 내가 더 예쁘다는 20년 전 발언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냐고 얼마 전에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의 한 마디.

 "송혜교는 만질 수 없잖아."

 

++ 사진은 결혼 10주년에 남편이 선물한 꽃바구니.

남편은 결혼기념일마다 꽃을 선물했다. 그러나 내가 제발 10주년을 끝으로 꽃을 사 오지 말라고 부탁하여 꽃 선물 의식은 종료되었다!

(난 시든 꽃 버리는 게 그렇게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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