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남편의 T 발언

의식을 거치지 않은 말이라나 어쩐다나

by JOO

남편은 연애 시절부터 결혼해서까지 한결같이 나에게 예쁘다고 말해준다.

예를 들면 "내가 요새 살이 엄청 쪘어." 하고 말하면 남편은 "살쪘는지 모르겠는데?"라고 하거나 "아니야. 괜찮아. 예뻐. 더 먹어도 돼."라는 대답을 한다.

나는 그것이 남편의 진심인지, 아니면 부부 사이에 예의상 하는 말인지 알지 못한다.


이에 반해 나는 남편에게 "자기 요새 배가 많이 나왔네? 운동해야겠어."라는 발언을 솔직하게 (T스럽게) 하는 편이다. 남편이 내 말에 상처를 받는지, 혹은 이제 단련이 됐는지 모르겠다. 다만, 가끔씩 "에휴, 내가 대문자 T인 자기랑 사느라 얼마나 힘들겠니."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의 말에서 때로는 고충이 있겠다 추측할 뿐. (그는 F 성향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게 바로 오늘인데, 사건이 벌어진다. 평화로운 일요일 오전 남편과 나는 식탁에서 빵과 커피를 먹고 있었고, 아이는 거실에서 만화를 보고 있었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나 미국 출장 다녀와서 살이 엄청 쪘더라고."

남편은 TV와 나를 번갈아가며 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빼."

"빼라고?"

내가 되묻자 남편은 매우 당황하며 "응?"이라고 말했다.

나는 남편의 말에 전혀 타격은 없었지만, 그의 반응이 재밌어서 그를 놀리기로 맘먹었다.

"살 빼라고?"

"응? 내가 그랬어?"

"어. 빼, 라고 말했잖아."

"아니, 저기 TV에서 뚜식이(만화 이름이자 캐릭터) 번외편이라 뚜식이가 나오는 게 아닌데 갑자기 뚜식이가 나오잖아. 그래서 뚜식이가 왜 나오지 보다가... 아니, 근데 내가 진짜 빼라고 그랬다고?"

"어! 단호하게, 대화를 대충 마무리하고 싶은 것처럼 빼! 이랬잖아."

"아니, 아닌데. 그게 뚜식이가... 내가 뚜식이 보느라고 말이 대뇌까지 안 가고 뇌간까지만 갔다가 뇌간에서 그냥 막 나왔어."

나는 남편의 반응이 너무 재밌어서 눈물 나게 웃었다.


남편아, 성향이고 뭐고 다 필요 없네. 무방비 상태에서 진심이 나왔잖니?


자꾸 아까 그 생각만 하면 풉 하고 웃음이 터진다. 내가 풉풉거리니 남편이 글감 나왔냐고 묻는다.

가끔씩 강렬한 글감을 주는 남편이 있어서 어찌나 즐거운지!

결혼기념일. 여보 우리 좋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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